1819년 8월16일 영국 맨체스터시. 노동자들이 성베드로 광장에 모여들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지만 살기는 더 어려워진 상황. 주급 60실링을 받던 면직공장 반숙련 노동자의 임금이 24실링으로 떨어진 반면 식량 가격은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지주의 이익보호를 위해 의회가 곡물수입을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광장은 금세 시위대 6만명으로 들어찼다. 미처 집회장에 들어오지 못한 노동자 3만명은 광장 외곽을 돌았다. 프랑스 혁명 같은 민중봉기를 두려워한 정부의 선택은 병력 동원. 제15 검기병대와 체셔ㆍ맨체스터 의용 기병대 1,500여명과 왕립 포병대의 대포를 깔아놓았다. 워털루 전투의 참전용사로 구성된 의용 기병대에는 술까지 먹였다. 집회를 주도한 급진주의자 헨리 헌트가 연단에 올라 특유의 연설로 시위대를 사로잡기 시작하자 기병대에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광장은 피로 물들었다. 경찰 공식집계 사망자만 11명. 여자와 어린아이 100여명을 포함, 500여명이 칼을 맞았다. 현장을 지켰던 기자들은 사건을 ‘피털루의 학살(Peterloo Massacre)’이라고 보도했다. 워털루(Waterloo) 전투의 용사들이 베드로 광장(Peter’s Field)에서 비무장 시민을 학살했음을 비꼬며 만들어낸 말이다. 피털루 학살은 영국의 정치ㆍ노동운동의 흐름을 바꿨다. 악법인 ‘단결금지법’이 1824년 폐지되고 참정권 획득운동에도 불이 붙었다. 1833년에는 공장법이 제정돼 최소한의 산업안전과 아동 노동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시작됐다. 곡물법도 폐지(1846년)돼 소비재와 식량 가격이 싸졌다. 정치운동 역시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 오늘날 영국의 집권여당인 노동당의 기원을 피털루 학살로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