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리빙 앤 조이] 극락도 살인사건

섬에서 벌이는 범인 잡기 '퍼즐게임'


고립된 곳에서 옆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간다면? 게다가 그 죽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 범인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면? 이같이 인간의 고립에 대한 공포와 타인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런 설정의 이야기들은 추리물이나 공포물을 통해 수없이 변주돼 왔다. 이런 플롯의 원류로 꼽히는 것이 영국의 여류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외딴 섬에 초대 받은 10명의 사람들에게 기묘한 사건이 이어지면서 이들이 하나씩 살해되는 구성으로 추리소설 중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이야기다. ‘극락도 살인사건’의 기본적 외양은 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많이 닮았다. 고립된 섬에 갇혀 의문의 범인에 의해 하나씩 죽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살인에 의해 점점 미쳐가는 남은 사람들 등 그 동안 수많은 영화, 소설들이 만들어 온 이야기들을 ‘극락도 살인사건’도 상당부분 가져왔다. 감독은 이를 한국식으로 창조적으로 변주한다. 영화 속에 영화의 배경이 되는 80년대 섬마을의 복잡한 인간관계에 기반한 다양한 갈등들을 얹어 놓은 것. 감독은 이렇게 인간의 원초적 공포에 기반 된 이야기를 우리 세계관에 맞는 친숙한 배경에 이식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의 배경은 아시안게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6년. 낚시꾼의 낚시에 살해된 사람의 잘린 머리가 걸려 올라오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부검 결과 그 시체는 주민이 17명뿐인 서해안의 작은 섬 극락도에서 흘러온 것임이 밝혀지고, 이에 섬을 찾게 된 경찰은 섬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섬 사람들 17명이 한꺼번에 실종된 것. 형사들은 섬의 곳곳에서 살인사건의 흔적을 찾아내지만 끝내 한 구의 시체도 찾아내지 못한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초반 분위기를 휘어잡은 영화는 이후 이 17명의 실종 사건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며 관객과 한판의 추리게임을 벌인다. 마을에 파견된 두 명의 송전기사가 마을 최고 어른인 김노인의 칠순잔치가 벌어진 다음날 살해되는 것을 시작으로 한명씩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엘리트 보건소장 제우성(박해일), 초등학교 여교사 장귀남(박솔미),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동네 이장(최주봉), 기이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마을 노인(김인문), 최근 갑작스럽게 머리가 좋아진 학교 소사 춘배(성지루) 등 마을 주민 17명 모두가 용의자. 제각기 숨겨진 비밀이 있는 인물들의 기묘한 관계를 통해 영화의 미스터리는 더욱 깊어진다. 살인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지는 과정이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커다란 강점. 국내에 추리영화에 대한 기반과 노하우가 거의 없음에도 감독은 할리우드나 일본 추리영화에 뒤지지 않는 몰입감으로 초 중반 관객들을 사건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반면 어지럽게 벌려 놓은 사건들을 허겁지겁 수습하느라 바쁜 영화의 후반부는 조금 아쉽다. 영화의 트릭 자체는 평범한 편. 추리소설이나 추리영화를 즐겨본 관객들이라면 쉽게 범인을 눈치챌 만하다. ‘유주얼 서스펙트’같은 강렬한 반전을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추리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면 영화는 상당한 즐거움을 보장한다. 박해일, 성지루, 최주봉 등 연기력 뛰어난 배우들의 앙상블을 지켜보는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 고립된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치열한 연기대결이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관객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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