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2월15일 새벽1시27분, 남해 여수 인근 소리도 앞바다. 초속 3.7m 서남풍을 탄 파도가 제주도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862톤짜리 여객선 남영(南榮)호를 덮쳤다. 인명피해 323명, 사상 최악의 연안 해난사고인 남영호의 침몰 순간이다. 선령 2년에 덩치도 상대적으로 컸던 남영호의 비극은 근무태만과 안전불감증이 만들어낸 인재(人災)였다. 무엇보다 사람과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다. 정원 302명에 탑승인원은 338명. 연말 대목을 노리고 밀감과 배추 같은 화물도 적재정량의 네 배 가까이 실어 남영호는 성산포항을 떠날 때부터 좌현으로 10도 기운 상태였다. 사고 뒤처리는 한심하다 못해 국가적 망신까지 불렀다. 침몰 직전 발신한 긴급구조신호(SOS)를 단 한 곳도 수신하지 못하고 일본에서만 희미하게 잡았을 뿐이다. 승객들이 처음 구조된 것은 오전8시께. 일본 어선에 의해서다. 일본 측의 무선연락을 받고도 해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교도통신의 보도가 나온 정오에도 '연락을 받은 바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던 해경이 출동한 시각은 오후1시. 일본의 순시선 급파보다 네 시간이나 늦었다. 당국이 헤매는 사이 표류하던 생존자들은 추가 구조된 6명을 제외하고는 영하의 바다에서 얼어 죽었다. 총체적 부실이었음에도 몇몇 하위직만을 처벌하는 데 그쳤다. '쌍고동에 허공 실어 침몰된 남영호야'라는 가사가 들어간 가요 '밤 항구 연락선'조차 국가 위신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다. 남영호 사건 이후에도 재난은 그치지 않았다. 1993년에는 293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훼리호' 사건이 일어났다. '서해훼리호' 이후 인명사고가 발생하지 않아서일까. 안전운항에 필요한 비용 60억원을 국고에서 부담하자는 해운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