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타임스 11월 22일자>지난 97년 아시아에 몰아 닥친 금융위기 이후 첫 해만 하더라도 한국의 혹독한 구조조정 정책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모범 사례로 비쳐졌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막대한 손실을 기록하고 있는 하이닉스 반도체에 메스를 대자 정부 당국의 개혁작업에 불안한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이닉스는 미국 경제와 전자부품 시장의 침체로 큰 타격을 입었다. 한국의 민영ㆍ국책 은행 등으로 구성된 채권단이 지금까지 하이닉스에 80억달러(약 10조4,000억원)가 넘는 자금을 대줬지만 하이닉스는 아직도 진흙 구덩이 속에서 허덕이는 상태다.
미국과 일본은 채권단의 하이닉스 지원이 불공정한 행위라며 이에 대한 보복을 가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물론 한국측은 하이닉스에 자금을 대준 일도 없을 뿐더러 은행에 지원을 지시한 일도 없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오히려 은행과 하이닉스측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만약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 정부는 하이닉스 문제를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닉스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처리됐다면 유동성을 확보해 정상화됐거나 아니면 이미 매각대상 기업 명단에 올라 있어야 한다.
은행지분 중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당국은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다. 하이닉스를 사겠다고 나서는 외국자본이 없다면 하이닉스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도록 국책 은행에 지시해야 한다.
현재 하이닉스의 유일한 희망은 반도체 업계가 회복되는 것뿐이다. 별로 그럴듯하지 않은 이러한 낙관론은 (하이닉스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는) 과잉 생산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장기적인 전망 역시 그리 밝지 못하다.
하이닉스의 주력 제품인 D램 반도체는 중국에서도 생산량이 늘어나고 있어 앞으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이 집중 육성하고자 하는 지식기반 사업과도 거리가 멀다. 성장이 기대되는 기업들에 투자할 돈을 끌어다 하이닉스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하이닉스가 파산하면 채권단인 은행을 포함한 한국 경제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미 대중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더 이상 표를 잃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사실상 여당의 재집권 문제에서 발을 빼놓은 상태다. 그런 만큼 경제 개혁을 가속화함으로써 당에 앞서 국가를 최우선시해야 한다.
그가 개혁작업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물러난 대통령이 아니라 한국을 지속적인 성장궤도에 올려놓은 역사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싶다면 용단을 내려야 할 때다.
<파이낸셜타임스 1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