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잔 돌리지 말라니까!


얼마 전 한 대학병원 의료진과 술자리를 같이했다. 저녁식사를 곁들여 술을 권커니 자커니 하다 보니 초면의 서먹함은 금세 사라졌다. 진료 받으러 갈 때마다 술을 자제하라던 의사들이지만 하나같이 주당들이었다. 술기운이 올라 맞은 편에 앉은 의사에게 내 잔을 건네며 술을 권했다. 그 순간 잔을 받은 의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는 잔을 받기는 했지만 입도 안 대고 내려놓더니 결국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자기 잔으로만 술을 마셨다. 민망하고 서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의사의 설명을 듣고는 그들만의 주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간염 바이러스에 수시로 노출 의사들이 술잔을 돌리지 않는 이유는 잔을 돌릴 때 감수해야 할 잠재적인 위험 때문이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다른 이가 마시던 술잔을 그대로 받아 마시는 것은 친밀함을 과시하는 수단일 수는 있으나 위생적으로는 상당한 위험을 각오해야만 하는 객기였다. 술잔을 돌릴 때 잔에 묻은 타액을 통해 감염될 수 있는 질병에 대해 설명을 듣고 보니 그동안 술자리에서 부린 호기는 속된 말로 '간이 붓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무모한 짓들이었다. 그렇다면 잔을 돌려 걸리는 질병의 하나인 간염에 대해 알아보자. 실제로 국립암센터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5~10%가 B형 간염 보균자로 추정된다. 직원 수가 10명인 부서라면 대략 한 명의 B형 간염 보균자가 끼어 있는 셈이고 이 부서가 일주일에 한 번씩 회식을 하고 그때마다 한 번씩만 잔을 돌려도 전부서원이 바이러스에 수시로 노출되는 셈이다. 게다가 만성 B형 간염의 17%가 간경변으로 진행되고 국내 간암 환자의 50~70%가 B형 간염 바이러스(HBV)에 감염돼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술자리에서 잔을 돌리는 습관이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난 12일 도하 일간지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국립암센터 신해림 박사팀은 저명 국제학술지인 '종양학 연보(Annals of Oncology)' 최근호 논문에서 "남성 암의 25.1%, 여성 암의 16.8%는 헬리코박터파이로리균이나 간염바이러스 등에 따른 감염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아울러 남성 중 암 사망의 25.8%, 여성 중 암 사망의 22.7%가 감염요인과 관련된 것으로 분석했다. 암환자 네 명 중 한 명가량이 감염으로 암에 걸리거나 사망한 셈이다. 또 감염성 암을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은 헬리코박터파이로리균으로 발생 원인의 56.5%, 사망 원인의 45.1%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B형 간염바이러스, 인유두종바이러스, C형 간염바이러스 등의 순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 네가지 요인이 전체 감염 암의 9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사정이 이렇게 심각해도 현실은 녹록지 않다. 직장 상사가 침 묻은 잔을 돌리는데 '더러워 못 받겠으니 내 잔에 따라달라'고 말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때문에 잔 돌리기를 자제하는 술자리 문화는 회사 차원에서, 또 직장 상사들이 주도해야 한다. 요즘 젊은 신입사원들, 특히 여직원들은 술자리를 좋아 하지 않는다. 윗사람들이'부어라' '마셔라' 하던 술문화가 바뀌고 있는 것을 애써 모른 체하지 말라는 얘기다. 내 잔으로 술 먹는 문화 조성을 한 발 더 나아가 정책 당국인 보건복지부에게도 한마디하고 싶다. 여러 시급한 당면 과제가 있겠지만 복지부는 선제적ㆍ예방적 차원에서 '잔 돌리지 않고 술 권하지 않는 회식 문화'를 권장하는 캠페인을 시작해야 한다. 술잔 돌리다 건강 망친 국민을 치료하는 데 재원을 소모하기보다는 선제적 예방 차원에서 캠페인을 하는 것이 정부 재정운용에도 유리하고 국민 건강에도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엊저녁에도 기자는 사회 선배와 술자리를 했다. 선배는 자신이 단숨에 들이킨 소주잔을 옷소매에 한번 쓱 문지르더니 기자에게 건넸다.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지만 그 잔을 피할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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