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열기자의 법조이야기] 6.29선언·직선제 끌어내
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져 숨졌다"는 코미디 같은 치안총수의 수사발표가 유행된지도 벌써 1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난 87년 1월14일 서울대 언어학과에 다니던 박종철(당시 21세)군이 서울 용산구 갈월동 치안본부(현 경찰청) 보안분실로 끌러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지 꼭 14년이 되었다.
기일에 앞서 지난 12일 박 군의 아버지 박정기(72)씨는 아들이 숨졌던 '현장'에서 처음으로 위령제를 지냈다.
그는 아들이 죽은 4평 좁은 방에서서 "철아, 아부지다. 이제 편히 눈감으래이. 애비도 이제 조금 편안히 너를 보낼 수 있을 것 같구나"하면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을 삼켰다. 박군이 숨진 이 방은 사고 당시 그대로라고 한다.
당시 박군의 사망은 물고문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군이 조사를 받던 중 책상을 '꽝 '치니 '억 '하며 쓰러져 사망했다"며 '단순쇼크사'로 발표했다 거짓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박군의 죽음은 참으로 비참했다. 수사관 2명이 수건으로 양손과 발목을 묶은 뒤 물고문을 하면서 "수배중이던 서클 선배 박종운(39ㆍ한나라당 부천오정지구당위원장)씨의 소재지를 대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박군은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또 다른 수사관 한명이 합세, 박군을 다리까지 들어올려 물속에 처박았는데 이때 목 부분이 욕조턱에 눌러 질식사하게 됐다. 결국 박군은 죽음으로서 모든 답변을 대신했다.
이 같은 박군의 고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경찰관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죄명은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등 혐의.
검찰은 강 치안본부장이 박군의 사체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1과장 황적준 박사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원인을 단순심장쇼크사로 했다는 것.
이에 서울지법 형사10부는 88년3월12일 강 피고인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및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재판장은 손진곤 부장판사, 배석은 유승정ㆍ오승종판사가 맡았다. 이 같은 판결에 대해 강 피고인과 검찰은 모두 항소 했다.
항소심인 서울고법 형사1부는 90년8월17일 강 피고인에 대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은 유근완 부장판사, 배석은 오상현ㆍ조용호판사가 맡았다. 검찰은 이 같은 판결에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 제3부 91년12월27일 강 피고인이 범죄를 은폐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 보냈다. 그러나 재판부는 직권남용 부분은 원심대로 무죄를 선고했다. 주심은 박만호 대법관이 맡았으며, 김상원ㆍ박우동ㆍ윤영철대법관이 관여했다.
대법원으로부터 파기환송 판결을 넘겨 받은 서울고법 형사1부는 93년4월2일 강피고인에게 징역8월에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재판장에 김대환 부장판사가, 김형진ㆍ김병운판사가 배석을 맡았다.
당시 박군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민주화운동의 불을 지펴주는 커다란 단초가 되어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88년 6.29선언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됐다. 따라서 체육관 선거가 사라지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