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포퓰리즘이 국가흥망 가른다] <9> 선심공약에 몸살 앓는 태국

새 정부 '돈 풀기' 약속…벌써 곳곳서 '인플레 쓰나미' 경고음<br>쌀 등 생필품값 자고 나면 치솟아… 기준금리 올려도 물가잡기 역부족<br>"최저임금 한꺼번에 인상등 실행땐 선진국 같은 재정적자 재앙올것"

태국은 최근 새 정부의 선심성 공약여파로 물가가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등 인플레이션 우려감이 높아지고 있다. 방콕의 한 식료품시장을 찾은 고객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방콕=서일범기자


#태국 방콕의 택시기사인 아난 차탐리(43)씨는 요즘 승객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생활이 갈수록 팍팍해진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돈벌이는 맨날 제자리인데 생활비만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마찬가지다. 매일 오전8시부터 오후7시까지 꼬박 일해 300밧(1만2,000원)가량을 벌어들이지만 자녀 학비와 식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그가 즐겨 먹는 쌀국수도 2년 전 20밧에서 지금은 30밧까지 올랐다. #지난달 28일 찾은 방콕 중심가의 시암파라곤 백화점.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한 1층 매장에는 쇼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에르메스 매장에 걸린 카디건에는 6만8,600밧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매니저인 푸이씨는 "고급 브랜드를 선호하는 고객이 많은데다 품질도 좋은 것으로 소문나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남아 2위의 경제강국인 태국이 총선 이후 불어닥친 인플레이션 쓰나미와 극심한 빈부격차의 후유증에 몸살을 앓고 있다. 서민들은 당초 기대와 달리 쌀 등 생필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생활고만 심해졌다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특히 잉락 친나왓 신임 총리가 지난 선거에서 내세웠던 각종 선심성 공약은 이제 부메랑으로 돌아와 태국 경제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방콕에서 기계무역을 하는 칠럼포 웡와이윗 사장은 "잉락의 정책은 장기적으로 태국 경제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선거 후유증이 경제 짓누른다=최근 태국 상공회의소대학은 재계 인사 820명을 대상으로 잉락 신임 총리의 공약 실행 여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전체의 65%가 공약 가운데 실천에 옮겨질 비율이 절반 이하에 머무를 것으로 예상했다. 새 정부의 공약 가운데 가장 논란을 빚는 것은 일용직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인상이다. 태국의 일일 최저임금은 지역별로 170~210밧 선으로 정해져 있는데 이를 300밧으로 일괄 상향하겠다는 것이다. 또 집권당인 푸어타이당은 50만밧 이내의 부채는 3~5년간 상환을 중지하고 100만밧 이상 빚은 아예 재조정해주기로 약속했으며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쌀 1톤당 수매가격을 1만5,000밧 이상으로 올려 잡았다. 또한 농업 종사자들은 소득과 관계없이 신용카드를 받게 되고 월세 1,000밧짜리 서민용 주택도 대거 지어진다. 방콕 아파트의 평균 월세가 1만밧 선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공짜나 다름 없는 가격으로 집을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태국의 경제연구기관들은 이런 '꿈 같은' 공약을 실행하기 위해 약 3조~4조밧가량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당연히 정부는 막대한 빚을 질 수밖에 없고 시중에 풀린 돈은 물가를 밀어 올릴 가능성이 높다. 최근 선진국에서 앓고 있는 재정적자의 위기가 태국에 닥칠 것이라는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태국의 에바페론'으로 불리는 잉락 총리는 오빠인 탁신 전 총리의 포퓰리즘 정책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때문에 태국의 포퓰리즘 역사는 이미 10년을 훨씬 넘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방콕의 한 대학 교수는 "태국 국민들은 자신이 내세운 공약을 성사시킨 탁신 전 총리처럼 그의 누이동생 역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고 있다"며 "푸어타이당 입장에서는 어떤 식이든 공약을 실현시킬 직접적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태국 정부가 돈 보따리를 풀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얘기다. ◇인플레이션 쓰나미가 몰려온다=잉락 총리가 공식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됐지만 이미 태국 곳곳에서는 인플레이션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있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태국인들의 주식인 쌀값이다. 태국 쌀수출연합회(TREA)와 방콕포스트 등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톤당 519달러에 거래되던 백미 가격은 7월20일 현재 톤당 563달러까지 치솟았다. 잉락 총리 당선 후 불과 보름 사이에 쌀값이 10%가량 급등한 것이다. 이는 쌀 수매 가격을 품종에 따라 무조건 1만5,000~2만밧 이상으로 인상하기로 한 푸어타이당의 공약 때문이다. 태국 정부는 오는 11월까지 쌀 수매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지만 한 번 요동친 시장은 쉽사리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차로엥 라오싸맛 TREA 부회장은 "정부의 쌀 수매 가격 보장공약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현재 톤당 1,100달러 내외인 쌀값(홈말리 품종)이 1,400달러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 경우 가격이 저렴한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의 쌀이 태국 국내로 밀려들어올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농민들의 호주머니는 잠시 불어나겠지만 아시아 시장에서 태국 쌀 산업의 경쟁력은 직격탄을 입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쌀값이 오르면서 식료품 값도 줄줄이 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방콕의 대표적 시장인 오또코 딸랏에서 파는 쌀국수나 볶음밥 가격은 최근 5~10밧씩 올랐다. 집에서 거의 밥을 해먹지 않는 태국인들은 이런 시장에서 음식을 사다가 끼니를 해결한다. 시장에서 만난 삼란 쿤시(38)씨는 "10년 넘게 장사를 했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밥값이 오르는 건 처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코너에 몰리는 중앙은행=원유 등 해외 원자재 값 상승으로 가뜩이나 인플레이션 우려가 고조되고 있는 터에 태국 정부가 시중에 막대한 돈을 풀기로 약속하면서 중앙은행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이는 '서민들의 소득은 높이되 물가를 잡으라'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았기 때문이다. 태국 중앙은행(BOT)은 올 들어 6차례나 기준금리를 올리며 물가 잡기에 나섰지만 뛰는 생필품 가격을 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미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이 올해 태국의 경제성장에 최대 위협요인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라산 트라이랏오라쿨 중앙은행 총재는 "재정적자 확대가 정부의 재정안정을 무너뜨릴 우려가 있다"며 "정부의 당면과제는 무엇보다 재정안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국 주택은행은 최근 푸어타이당의 핵심 공약대로 생애최초 주택구입자에게 '제로(0) 금리'의 담보대출에 나서자면 약 500억밧이 필요하다고 전망했다.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시장에 돈을 퍼부으면서 어떻게 통화 가치를 지키겠느냐"는 비관론이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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