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적 현실과 정치적 기교

이성적으로 미국 내 민주주의의 운영양상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정치와 경제에 관한 서로 연관된 두개의 수수께끼에 직면해 일말의 혼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첫째는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쟁과 북한의 핵무기 개발 위기, 또 지난 2001년 9월11일 이래 지속되는 알카에다의 테러위협과 관련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 두번째는 거의 아무런 사전예고 없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일련의 과감한 새 경제 프로그램을 내놓은 점이다. 게다가 부시 대통령은 지금껏 재무부와 백악관에서 경제체제를 수립해온 폴 오닐과 로렌스 린지를 해고하고는 경제자문들을 새로 지명해 혼란을 가중시켰다. 20여년 전 영화배우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테플론 대통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가 큰 실책을 저지르거나 모순된 행동을 보여도 대부분의 경우 별 타격을 입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현 부시 대통령 2세는 훗날 역사책에 `지그재그 대통령`이라고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다.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사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이 백악관에 입성했을 당시만 해도 이들은 옛 시절을 연상시키는 미국 고립주의자들로 여겨졌다. 2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이라크 침공이 거의 확실시되는데다 핵무기 개발을 내세워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체제와의 갈등이라는 두 가지 상황에 휘말려 있다. 그런가 하면 부시 대통령은 통상 적극적으로 자유무역을 주장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국내 철강업계 로비스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구시대적인 수입관세를 부과하기도 한다. 하기야 정치인이 정치적으로 행동한다고 누가 놀라기야 하겠는가. 부시 대통령은 오닐 장관과 린지 보좌관에게 잘못이 있다고 보고 해고를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물러난 것은 부시 대통령이 그들에게 바랐던 실리적 수완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마구잡이식 혼돈으로만 보이는 이 상황 속에는 하나의 그럴 법한 패턴이 엿보인다. 미 유권자들이 오늘날까지도 주기적인 증시침체와 빈번한 해고, 기업들의 뼈아픈 경영실적과 무수한 도산 등 거품붕괴의 잔해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유권자들의 기억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지만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소위 `허니문 경제`가 만개했던 민주당 정권 시절이 지금보다 얼마나 좋았었는지는 아직까지 이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분명 미국인들은 안보를 지키기 위해 부시 대통령의 통솔 아래 일치단결하고 있다. 하지만 백악관 무대 뒤의 도박꾼들은 불만에 찬 유권자들이 국내경제 부진의 책임을 대통령에게 돌릴 수도 있다며 불안에 떨고 있다. 부시 정책의 일관성과 연속성에 관해서는 또 하나 보다 심층적인 요인을 들 수 있다. 2000년 11월 대선 당시 표차이가 너무 미미함에 따라 재계의 요청에 부응한 대규모 감세 프로그램 입안이 오는 2005~2010년이라는 먼 훗날로 미뤄졌다는 점이다. 때문에 현재 닥친 거시경제의 어려움은 당초 부시 대통령이 내세운 비전을 굳히고 그 범위를 더욱 확대하기 위한 논거로 활용될 수 있다. `철이 뜨거울 때 두드리라`는 책략적 정치가들을 위한 옛 격언이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 새 감세정책을 통해 기업 자본소득세가 절감되면 미국의 세수가 얼마나 줄어들 것인지 월가는 아직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조세회피 등과 같은 미묘한 부분은 무시하고 기본적인 부분만 따져보자. 의회에서 통과된 내년도 재정 프로그램이 과연 미국과 세계경제 사이클을 이중침체(더블딥)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 지금부터 내년 11월까지 미국의 재정정책은 성장동력에 적당한 활기를 돋우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상당히 느슨하게 운영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미국 내 다양한 소득층들을 지탱하기 위한 핵심사안이다. 이는 또 세계경제를 위한 모종의 보장이기도 하다. 독일과 일본의 동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ㆍ남미 제조업자들에게 제법 괜찮은 수입시장 역할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제언하건대 미래가 현재보다 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04년 이후에 직면하게 될 문제까지도 현단계에서 충분히 숙고를 거쳐 내놓는 정책이라야 훌륭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일이 지나면 항상 또 다른 내일이 오게 마련이다. 아울러 좋건 나쁘건간에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나 부시 대통령이 해올 수 있었던 어떤 일들도 지금 유로화 사용 국가의 지도자들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ㆍ독일 중앙은행의 총재들은 역내의 웃풍에 거스르면서까지 휘두를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지 못했다. 독일은 10%를 넘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아무리 재정부양책을 구사하려고 해도 EU의 규정에 묶여 재정적자를 일정 수준 아래로 제한해야 한다. 앞서 경제 비평가들은 통화통합은 과거 금본위체제가 가져온 부담을 다시금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 득(得)이 고통보다 큰 것이 될지는 시간만이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폴 새뮤얼슨(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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