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이 일본식 장기불황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유로존 경제의 모범생인 독일의 성장엔진마저 급격히 식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플레이션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유럽중앙은행(ECB)은 양적완화(QE) 등 파격적인 경기부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보다 적극적인 경기부양과 재정긴축·구조조정을 우선해야 한다는 유로존 국가 간 입장차가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 긴축을 강조해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급격한 경제지표 악화에 경기부양을 위한 투자 확대 의사를 밝히며 독일의 태도변화를 시사해 ECB의 운신의 폭을 넓혀줄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다.
현재 유로존 경제와 관련해 가장 큰 우려는 독일 경제의 마이너스 성장 가능성이다. 9일(현지시간) 발표된 독일의 지난 8월 수출금액이 전달 대비 5.8% 줄어든 926억유로(약 126조9,700억원)에 그쳐 2009년 1월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을 기록했다는 소식은 유럽발(發) 경제위기가 목전에 다가왔다는 불안감에 기름을 부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최근 독일 내 유력 경제기관 5곳은 공동 발표를 통해 올해 3·4분기 및 4·4분기 경제성장률(GDP) 전망치를 각각 0.0%, 0.1%로 하향 조정했다. 이를 포함한 올해 독일의 GDP 성장률은 1.3%, 내년에는 1.2%에 그칠 것이라고 이들은 내다봤다. 6개월 전에 내놓았던 전망치에 비해 각각 0.6%포인트, 0.8%포인트 내려 잡은 것이다 .
NYT는 "(9일의 수출) 지표는 독일 경제가 그 모멘텀을 잃고 있음을 확인시켜줬다"며 "일부 전문가들은 향후 1개 분기 혹은 2개 분기 동안 독일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 경제의 약 30%를 차지하는 독일 경제의 추락은 곧 유로존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전문가들은 유럽이 또다시 전 세계 경제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한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이날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IMF·세계은행 연차총회 개막 회견에서 "과거 일본의 장기침체를 야기했던 저물가 현상이 현재 유로존에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하며 유로존 경제위기 극복 논의가 이번 총회에서의 주요 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이어 "독일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한 흑자예산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며 독일 역할론을 주문했다. 유로존의 경제위기가 부각된 후로 재정긴축을 고집해온 독일 정부가 이제는 주도적으로 돈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역시 연차총회에 앞서 진행된 브루킹스연구소 주최 회동에서 독일을 겨냥해 "재정적 여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그것을 사용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드라기 총재는 "필요하다면 비통상적 개입의 규모와 구성을 바꿀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시장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오고 있는 미국·일본식 양적완화 도입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독일의 재정부양 요구에 대해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양적완화 정책은 각국이 보다 쉬운 방법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면서 모럴해저드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며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네덜란드 정부 역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ECB에 너무 의존하려 한다"고 하는 등 인위적 경기부양책을 놓고 유럽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독일이 외형적으로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는 가운데 메르켈 총리는 자국의 경제지표가 잇따라 부진하게 나오자 이날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투자 확대 촉진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특히 디지털 및 에너지 부문에서의 투자 확대를 집중해서 보고 있다"고 말했다. NYT는 "메르켈의 발언은 침체된 독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정을 투입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한 것"이라며 "이는 유로존 이웃 국가들에도 경기부양에 예산을 좀 더 쓸 수 있도록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