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2007년을 빛낼 CEO]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2010년 유통분야 매출 3兆 달성" <br>삼성플라자 인수계기 그룹 핵심사업으로 육성<br>보수 경영 탈피 항공·부동산등 공격적 진출 눈길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장영신 회장

애경그룹은 매출 2조원에 18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 그룹이지만 아직 일반인에게는 비누와 치약 등 생활용품 업체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분당 삼성플라자 인수 뿐 아니라 제주에어를 설립해 항공사업에 진출하는 등 M&A와 신규사업 진출 등으로 재계의 이목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애경의 행보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장남인 채형석(46) 총괄부회장이 주도하고 있다. 채 총괄부회장은 지난 93년 애경백화점 개점을 지휘하며 유통업에 진출해 매출 6,000억원의 외형을 일궜다. 또 저가항공은 어렵다는 주변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난 6월 제주에어를 출범시켜 3개월만에 탑승률 80%를 넘어서며 안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수원과 평택의 민자역사 사업 등 부동산 개발도 그룹의 신성장 사업으로 육성중이다. 채 총괄부회장의 경영능력 발휘는 유통부문에서 시작됐다. 85년 애경유지공업은 지금의 애경㈜인 애경산업에 생활용품 사업부문을 넘기고, 전문 화학계열사를 설립해 석유화학 부문에서도 손을 떼게 됐다. 따라서 지주회사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찾아야 했다. 이듬해 애경유지공업 대표로 취임한 그는 공장부지의 활용 방안 등 신규 사업을 물색하던 중 유통ㆍ백화점 쪽에서 가능성을 찾아 백화점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5년간 다각도로 사업계획을 검토하고 선진 백화점을 벤치마킹해 93년 구로점을 개점했고, 이후 수원점을 열었다. 평택점도 추진중이다. 이러한 자신감은 면세점 사업 진출로 이어져 2001년 인천공항과 지난해말 김포공항에 AK면세점을 입점시켜 점진적인 확장을 꾀하고 있다. 채 총괄부회장이 백화점을 시작으로 진출한 유통사업은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삼성플라자 인수를 계기로 유통부문은 애경그룹을 이끌어가는 핵심사업군으로 자리잡게 될 전망이다. 86년 애경유지공업㈜ 대표이사로 취임했던 그는 꼭 20년이 흐른 지난해 11월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에 올랐다. 사실상 애경그룹을 진두지휘하는 총수가 됐다는 것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채 총괄부회장은 지난해말 그룹을 ▦생활ㆍ항공부문 ▦화학부문 ▦유통ㆍ부동산부문 등 3개부문으로 나누고 사상 최대규모의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그는 “3개 부문이 모두 우리 주력사업으로 애경 발전의 성장축이 될 것”이라며 “3개 부문에서 앞으로 5년 내 20%씩 성장시키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특히 유통시장에서 외형확대를 통한 경쟁에 집착하지 않고 애경만의 스타일로 2010년까지 유통부문 3조원의 매출 달성을 확신하고 있다. 지난 52년 동안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추구하던 애경그룹이 기존 방침에서 벗어나 유통부문의 팽창과 항공업 진출 등 공격적인 성장을 택한 것이 옳았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 2007년 채 총괄부회장의 행보가 주목 받는 이유다. 채 총괄부회장은 검소한 가풍 속에 자란 덕에 검소하고, 소탈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집무실은 3∼4평정도 크기의 소파와 책상 에어컨이 전부. 벽은 그 흔한 그림 액자 하나 없어 썰렁하다. 심지어 바로 아래 동생이며 유통부문을 맡고 있는 채동석(42) 부회장과 10년이 넘게 한 사무실을 쓰고 있다. 사무실 문에는 아무런 표기조차 없다. 하지만 같이 쓰는 이유는 검소함 때문만은 아니고 형제간의 두터운 우애 때문 탓도 크다. 애경 직원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다고 소문날 정도. 두 형제간 우애뿐 아니라 애경그룹 오너 일가의 끈끈한 가족애는 업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장 회장 슬하에 3남1녀를 두고 있지만 2세 경영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기기 쉬운 경영권 분쟁은 아예 찾아보기 힘들었다. 집안 분위기는 상당히 자유로운 편. 다른 재벌처럼 정략결혼도 없다. 그는 성균관대 시절 학교앞 분식점에서 첫눈에 반한 부인 홍미경(44)씨와 결혼에 골인했다. 처남-매부지간인 채 총괄부회장과 안용찬 부회장은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지금도 단짝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같은 연배의 이 둘은 경영 파트너이자 조언자로서 상호 보완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애경그룹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채 총괄부회장은 백화점 대표 시절에 직원 생일에 꽃을 직접 전달할 정도로 직원들에게 살갑게 대해 주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또한 백화점 세일처럼 큰 행사가 있을 경우 주차장에서 직접 주차 안내에 나서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매일같이 아침 5시에 일어나 주요 신문을 정독 한 후 출근한다. 일찍 일어나는 대신 일찍 잠자리에 들어 9시면 잠자리에 든다. ◇ 채형석 총괄부회장 약력
▦60년 서울 생
▦83년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85년 미 보스턴대 경영대학원 MBA
▦85년 애경산업㈜ 감사
▦85년 애경유지공업㈜ 감사
▦86년 애경유지공업㈜ 대표이사
▦2001년 애경그룹 부회장
▦2006년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 CEO 메시지
"한우물만 파면 성장 멎을수도"
요즘은 기업이 건강한 성장동력을 키워나가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새로운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한 순간의 판단 실수로 회사경영이 어려워질 수 있고, 한 우물만 팔 경우 자칫 성장이 멈춰버릴 수도 있습니다. 애경은 지난 50년대 생활용품 기업으로 출발, 70년대 화학분야, 90년대 유통분야, 최근에는 항공사업으로 사업을 넓혀 왔습니다. 이 같은 3개 부문 모두 우리의 주력사업이며 궁극적으로 애경 발전의 성장축이 될 것입니다. 특히 유통과 항공, 부동산개발사업은 애경그룹의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적극 육성해 나갈 계획입니다. 제주에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국내선 위주의 저가 항공사 하나쯤 나올 때가 됐습니다. KTX 열차 개통 이후 국내선 항공시장이 크게 위축된 것이 오히려 신생 업체인 우리에게 기회를 열어줬지요. 후발 항공사로서 제주에어의 출범은 경쟁을 심화시킨다기보다 가격 경쟁력을 통한 새로운 수요 창출입니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이 제주항공을 경쟁 상대로 봐 초기부터 값 내리기를 하면 서로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서로 윈-윈해 나가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애경은 이제 해외 쪽으로 서서히 눈을 돌려야 합니다. 국내에서는 추가 인수ㆍ합병을 통한 경쟁력 강화와 신사업 발굴에 나서는 동시에 국내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외 시장 개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간과해서는 안될 게 있습니다. 성장도 중요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상생'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한 기업이 모든 경쟁력을 갖추기보다는 애경과 파트너가 되는 회사가 다 같이 윈-윈할 수 있는 사업 분야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얘기지요. 일례로 애경백화점의 경우 식품매장은 GS슈퍼, 서점은 북스리브로, 외식은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 영화관은 CGV가 각각 맡아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직영을 하면 수익이 더 클 수 있지만 협력사 만큼의 전문성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못 먹을' 확률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원들과의 호흡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원들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행복해지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힙니다. 그들은 저와 삶을 같이하는 동료들입니다. 그래서 임직원이라는 말 대신 '애경 가족'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 장영신 회장이 말하는 채형석 부회장 어린시절
10살때 아버지 여의고도 오히려 "엄마 걱정마"
채부회장이 10살때 애경그룹의 창업자이자 부친인 채몽인씨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타계했습니다. 당시 저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10년 동안 가사에만 전념했던 탓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 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그때 '하늘이 노랗다'거나 '거짓말 같다'라는 말뜻을 진심으로 체험했습니다. 올망졸망한 네 아이들, 게다가 막내아들은 이제 세상에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되었던 시절입니다. 저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렇게 서너달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집 앞에서 넋놓고 앉아있는 저에게 당시 10살이던 채부회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걱정 마. 이 앞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상대로 뽑기 장사하면 되잖아!"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엄마가 실의에 빠져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입니다. 자신 역시 좋아하던 뽑기장사를 해서 먹고살면 되니 엄마보고 걱정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0살짜리 큰아들이 너무나 대견하고 안쓰럽고 고마워 아이를 끌어안고 그때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울지 않는 엄마, 강한 엄마가 되어 내 아이들을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아들로 키우기로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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