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 로비 활용하고 협상팀 임기 보장해야굳이 제도가 아니라도 우리의 잘못된 관습으로 국가적 대사를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제도나 기구의 조정에 앞서 인식 변화만으로도 통상외교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도 적지 않다.
◆민간인은 안돼→전문가를 활용하라
외환위기 직후인 98년1월. 국제 신인도, 외환보유고 등 모든 게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에서도 외채협상팀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민관을 가리지 않고 전문가를 총동원했기 때문이다.
김&장법률사무소의 정계성 변호사 등이 외채협상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통상교섭의 모범케이스로 꼽히는 지난 92년의 한미통신협상의 성공 이유도 적극적인 민간전문가 활용에 있다.
슈퍼 301조를 내세워 한국을 통신분야 우선협상국으로 지정하고 통신시장 전면개방을 요구하는 미국에 맞서 정부는 통신개발연구원 등에 근무하는 민간전문가들이 대거 중용됐다.
당시만해도 통신 분야를 제대로 아는 공무원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시장을 개방하면서도 한국은 내성을 길러 세계적인 통신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전문가를 활용한 성공사례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오히려 이전보다 못한 상황이다.
최근 EU와의 조선협상을 위한 통상대사로 임명된 이희범 한국생산성본부 회장의 사례는 민간전문가를 활용하는 정부의 인식을 극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이 회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EU전문가. 산업자원부 차관출신으로 조선협상을 수년간 주도해온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EU와 조선문제가 불거지자 통상대사로 임명됐다.
예비군의 비상소집인 셈이다. 그런데 외교통상부가 제동을 걸었다. EU의 중요인물들과 만나는 일정 확인, 숙소와 의전 등 의례적으로 제공하는 의전서비스를 해줄 수 없다며 나선 것. 국가조직인 외통부가 민간인의 활동을 뒷받침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전투중 지휘관 교체→협상전문가 임기 보장 시급
결국 파경으로 끝났지만 현대투신증권 매각을 위한 미국 AIG컨소시엄과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던 지난해 7월.
정부는 느닷없는 인사를 단행한다. 협상을 진두지휘하던 진동수 당시 금감위 상임위원을 세계은행의 특사로 파견한 것. 누구도 이 인사에 불만을 달지 않았다.
당장 1급 자리가 생기는 연쇄 승진요인이 발생한게 가장 큰 이유다. 전투가 한창 진행되는 상황에서 군인들의 승진을 위해 장수를 교체하는 악순환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마늘협상도 마찬가지. 지난해 9월 이후 마늘협상을 벌인 우리측 대표의 평균재임기간은1개월에 불과하다. 업무를 파악할 시간도 없이 수시로 대표가 변경됐다는 사실은 애초부터 구조적으로 실패가 불가피했다는 얘기다.
◆모든 것은 장관이→실무자에게 권한을
미국 무역대표부는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전문가가 수두룩하다. 무역대표부의 과장급이 협상단 대표를 맡고 실무부처의 차관보급이 부대표를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협상의 내용과 전문지식, 실무경험이 중요시된다. 우리는 정반대다. 실무부처의 장관선에서 해결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청와대나 정치권이 개입해 일을 그르치는 게 다반사다. 그러나 보니 의욕적으로 일을 하려는 실무자는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뉴라운드 협상대책위원회'는 통상교섭본부 통상교섭조정관(1급)을 수장으로 각 부처의 실무국장들이 참석하는 비상설 기구. 정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DDA에 대비하기 위해 마련된 중요한 위원회다. 그러나 회의가 제대로 성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처음에는 과장급이 대리참석하다 요즘에는 사무관들만 모인다. 모부처의 한 국장은 "국장급 회의를 해도 결국은 뒤바뀌는데 참석해야 뭐 하냐"고 반문했다.
◆사진만 찍으면 능사→합법적 로비 활용하라
통상 교섭을 위한 각 부처장관들의 해외나들이가 부쩍 많아진게 사실이지만 영양가가 별로 없다. 그러나 유명지도자와 잠깐 만나 사진 찍는 게 보통이다. 해외 공관은 외국 지도자의 바쁜 일정을 쪼개 시간을 내달라고 사정하는 데 소요된다.
미국에서 우리보다 로비예산을 적게 쓰면서도 이스라엘과 대만 등은 학맥과 혈연을 총동원, 로비의 귀재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의 접촉대상은 주로 실무급이다. 반면 우리의 로비대상은 장관급 이상이고 로비자금은 호텔 만찬, 연회 등에 주로 투입된다.
◆치적, 이벤트에 집착→단기 성과에 급급하지 말라
중요한 협상에 고위층의 국빈방문 등이 있을 경우 협상은 졸속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한일 어업협상이 그랬고 한중 어업협상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외교에 따른 가시적 외교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무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직도 대통령과 장관이 방문한다고 해서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하는 시대는 사는 대가는 너무도 크다.
프랑스의 고속전철의 사주는 대가로 반환을 약속받았던 외규장각 문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일개 사서의 반대로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는 점은 한국의 단기성과주의와 외국의 실무자 중심의 실리형 외교, 내치를 반영하는 사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