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대한민국'으로 나가는 2010년. 한국경제 발전의 50년을 함께한 서울경제신문은 새로운 100년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한국경제 발전 100년. 서울경제신문은 그 첫 페이지에 희망이란 단어를 크게 쓴다. 국내 최초의 종합경제정론지인 서울경제신문은 지난 1960년 8월1일 창간 이래 우리 경제 발전의 영광과 궤를 같이했다. 4ㆍ19 민주혁명 이후 경제발전이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시대적 배경에 탄생한 서울경제신문은 우리 사회에 정확한 경제정보를 전달하고 우리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서울경제신문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막을 연 한국경제의 태동기부터 1970년대 고도성장기를 지나 1980년 군사정부의 암울한 시대, 강제폐간의 시련을 넘어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우리 경제발전의 50년 역사와 애환을 같이했다. 태동기 (1960년대) 1960년 8월1일 서울경제신문 지령 1호 1면 기사는 '경제 9월 위기 심각화'. 4ㆍ19 민주혁명 이후 불안한 물가, 외환부족 등으로 위기상황에 치달을 것으로 예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불안한 경제는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며 5ㆍ16 군사쿠테타로 이어졌다. 한국일보의 세 번째 자매지로 탄생한 서울경제신문은 창간 당시 신문 제작인원 20명, 지면은 4개면이었다. 장기영 한국일보 창간사주가 1947년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으로 재직할 당시 경제계의 인사들과 경제 재건을 토론하던 '서울경제연구회'에서 이름을 따 '한국' 대신 '서울'이란 명칭을 제호에 달았다. 1960년대는 우리 경제와 서울경제 모두 성장의 토대를 닦는 시기였다. 경제위기를 딛고 탄생한 군사정부는 수출 공업화 정책을 시작하며 개발연대의 서막을 열었다. 1961~1965년 경제는 연평균 6.4% 성장했고 1970년대까지 연 10%의 고속성장을 질주했다. 성장기 (1970년대)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1970년 8월1일 서울경제신문의 1면 머릿기사는 '박정희 대통령 낙동강, 영산강 개발'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4대강 사업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모습이다.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한국경제는 고속성장했다. 물가상승을 걱정할 정도였다. 경부ㆍ호남ㆍ영동고속도로와 철도 선박 교통망이 본격적으로 건설됐다. 서울경제신문도 경제성장 붐을 타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1974년 1월21일부터 주 24면에서 36면으로 증면했고 1975년 12월3일에는 부동산 정보란을 신설했다. 1978년 8월1일에는 뉴욕에서 미주판을 발행했다. 서울경제신문은 시대를 앞서갔다. 1970년 창간 10주년 사설은 "신문이 지닌 進步的 자세를 잊으려 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경제개발의 기본 목표는 국민의 福祉 向上에 있다. 선진국의 장점을 모방할 자유가 있다"고 제언했다. 개발이 절대 목표였던 1970년대 서울경제신문은 복지를 말했고 한국형 국가 모델의 방향을 제안했다. 암흑기 (1980년대) '80년 서울의 봄'은 신성장ㆍ후분배 정책의 후유증을 총ㆍ칼로 억눌렀다. 강압에 경제발전과 함께 사세를 확장했던 서울경제신문도 이유 없는 폐간을 당했다. 1988년 복간까지 강탈 당한 서울경제의 역사는 우리 경제의 시련을 예고했다. 원자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는 두 차례의 석유파동(1972~1973년, 1979~1980년)을 거치면서 급격한 물가상승과 경상수지 적자에 이은 막대한 재정적자 등 고성장의 후유증은 1980년 초 우리 경제를 괴롭혔다. 1980년대 초 고단한 외채 위기 상황을 일거에 풀어준 것은 수출이었다. 때마침 불어온 저금리ㆍ저환율ㆍ저유가의 3저(低) 현상을 등에 업고 수출증가율은 30%가 넘었다. 경제는 3년 연속 두자릿수 성장을 구가했다. 그러나 반짝 호황은 3저 현상이 사라지며 더 큰 후유증을 남겼다. 호황기에 유입된 유동성을 바탕으로 부동산 거품이 발생했고 정부가 내수진작용으로 주택 200만가구 건설 계획을 밀어붙였으나 이것이 악수가 됐다. 재도약기 (1990년대) 반도체 호황은 경제에 착시를 가져왔다. 마치 선진국에 올라선 듯 장밋빛 꿈에 젖었던 한국경제는 경제개발 역사 이래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대기업들의 연쇄 파산과 외화유동성 부족으로 1997년 12월3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55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는 치욕을 겪게 했다. 외환위기 당시 경제성장률은 1996년 7%, 1997년 4.7%에서 1998년 -6.9%로 곤두박질친다. 그러나 한국민의 역동성은 위기를 당당히 극복했다. 1990년대 말 전세계적 IT붐에 이은 벤처붐은 외환위기를 벗어나는 원동력이 됐다. 시련의 시기를 거친 서울경제신문은 1988년 8월1일 복간 이후 1990년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재도약을 위한 발판을 다졌다. 위기는 기회. 외환위기 이후 증권시장의 성장은 빠르고 정확한 경제정보에 대한 욕구를 키우며 서울경제신문 재도약의 발판이 됐다. 정상을 향해 (2000년대)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섰지만 21세기의 첫해는 만만치 않았다. 세계경제가 침체기를 맞는 가운데 IT버블붕괴에 9ㆍ11테러까지 악재가 악재를 낳았다. 뒤이은 가계부실과 카드채 대란은 소비심리 위축과 실업률 급증으로 이어졌다. 외환위기 이후 10년,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1998년과 달랐다. 위기에 대한 내성으로 다져진 체력(대외건전성ㆍ외환보유액 등)은 강해졌지만 10년 뒤 다시 찾아온 위기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선진국들의 경제는 일본을 제외하고 높은 성장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2008년 위기는 선진국은 물론 전세계를 침체에 빠져들게 했다. 부동산가격 장기하락과 신용경색이 동반된 경기침체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처음이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위기에 강했다. 적시의 재정확장 정책과 금융안정성 확보는 한국경제가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일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서울경제신문은 이제 한국경제의 100년을 말한다. 숨쉴 틈 없이 몰아 닥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직하고 빠른 경제정보를 바탕으로 한국경제 발전을 이끌어나갈 것이다. 한국경제와 함께 서울경제신문은 정상을 향해 다시 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