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12월 26일] 무늬만 진보인 대못을 뽑자

월스트리트의 금융위기와 메인스트리트의 실물위기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점점 위기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세계경제는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외부의 거센 풍랑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철학이 바른 방향으로 정립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창의와 자율성이 훼손되는 방향으로 수립되고 집행된 정책의 대못을 뽑아버려야 한다. 대못이 계속 박혀 있으면 개인의 창의와 자율성에 바탕을 둔 기업가 정신은 실종되고 경제의 활력은 점점 떨어지게 된다. 학생들은 자기의 특성을 살려 열심히 공부하면 자기만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열심히 배우고 싶어도 학교 수업에서 이를 충족시킬 수 없다. 학습능력이 천차만별인 교실에서 학교 선생님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학생들과 함께 방황하고 있다. 학교는 쉬는 곳이고 학원은 공부하는 곳이라는 관념이 학생들 머릿속에 이미 자리잡혀 있다. 모두 교육 평준화의 산물이다. 평준화는 바로 개인의 창의와 자율성을 말살하는 비도덕적 행위다. 중학생의 학력평가를 무한경쟁으로 비판하는 전교조 관련 기사를 보면 전교조가 꿈꾸는 사회는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평준화를 지향한 좋은 예는 바로 우리의 이웃에 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으로 무장하고 인민이 모두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에는 무한 경쟁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에 나와 취직을 하면 강성노조 때문에 다 함께 승진도 하고 월급도 올라가니 혼자서 잘난 채 열심히 하면 모난 돌이 정에 맞는다는 충고만 듣게 된다. 성장위주의 정책 때문에 이만큼 살게 됐으니까 이제 분배위주로 나가야 된다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때문에 혼자서 열심히 해도 함께 나눠야 하니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그저 적당히 하는 것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하에서는 능력에 따른 차별화가 이뤄질 수 없고 능력을 키울 여건은 더더욱 조성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진보라는 말이 오용되고 있다. 경제적 효율성을 증진시키기보다 분배에 치중하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진보고 성장을 통한 분배를 주장하면 보수로 낙인찍힌다. 성장을 통한 분배가 자유주의 경제정책이라면 분배에만 치중하는 정책은 진보정책이 아니고 사회주의 경제정책이다. 이를 진보라는 이름으로 결코 포장될 수 없다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개혁해야 한다. 그러나 두 걸음 후퇴하는 반개혁적 정책을 폐지하려 하면 진보라는 이름하에 저항이 거센 것을 볼 때 우리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이 많다고 이를 혼내기 위해 종합부동산세라는 세금 폭탄을 투하하려면 적어도 부동산의 처분이 용이하도록 양도세를 완화해줘야 한다. 반시장적인 분양가 상한제 폐지, 그리고 이미 실효성을 상실한 강남 투기지역해제 등이 강부자 정권이라는 부담 때문에 제고돼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1% 가진 자를 없애면 바로 밑의 1%가 가진 자가 되고 이를 없애는 정책을 계속하면 모두가 못사는 사회를 지상천국이라는 미명하에 호도될 수는 없다. 깨어진 쪽박이 뒹구는 가운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공허하게 울려퍼지는 나라가 소위 개혁을 통해 지향해야 할 방향일까. 아니면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이 그렇지 아니한 사람보다 안락한 삶을 누리는 사회가 바람직한가. 개미와 베짱이 우화를 통해 답은 삼척동자에게도 명백하나 진보라는 미명하에 베짱이가 우대 받는 사회가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큰소리치고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 모두가 돈을 벌기보다는 남이 번 돈을 나눠달라고 때 쓰고 이를 소비하는 베짱이가 될 수밖에 없다. 개미는 사라지고 베짱이만 득실거리는 사회에 ‘대~한민국’이 다시 울려퍼질 수 있을까. 너무도 답이 자명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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