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12일] 카레 전투 & 크라수스

병력 4만 대 1만. 로마는 승리를 자신했다. 결과는 로마군의 참패. 파르티아 기병대는 네곱이나 많은 로마군을 물리쳤다. 로마군 전사자만 2만명. 1만명이 포로로 잡히고 불과 수천명만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던 한니발에게 혼난 후 최대의 패배. 기원전 53년 6월12일 일어난 일이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발생했던 ‘카레 전투’는 로마가 복수하지 않은 최초의 싸움. 패배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던 이전과 달리 로마는 다시는 동방을 넘보지 않았다. 동서양 문물의 경계가 이날 전투로 정해진 셈이다. 카레 전투는 공화정의 몰락도 앞당겼다. 총사령관인 크라수스(Marcus Crassus)의 전사로 삼두정치의 견제와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카이사르ㆍ폼페이우스와 더불어 삼두정의 한 축이었던 크라수스는 부자 중의 부자. 1억7,000만 세스테르티우스가 넘는 재산을 보유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의 연간 예산이 2억 세스테르티우스였으니 그의 부를 가늠할 수 있다. 크라수스의 치부 수단은 사설소방대를 통한 부동산 개발과 고리대. 독점소방권을 따낸 후 큰 돈을 받을 때만 출동했다. 건물주가 돈을 주지 않아 잿더미로 변한 건물은 헐값에 사들여 재개발해 비싸게 되팔았다. 군사적 명망과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자원한 동방원정에서도 크라수스와 로마군은 전투보다는 약탈과 재산에 관심을 쏟았다. 제2의 알렉산더를 꿈꾸며 인도를 넘어 상상 속의 나라로만 여겨지는 중국까지 도달하겠다던 크라수스의 최후는 두 갈래 설이 존재한다. 총사령관을 적에게 내주지 않으려는 부하 장군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게 정설이지만 파르티아의 수도로 산채로 끌려가 펄펄 끓는 황금을 강제로 마시고 죽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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