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외환위기 그후 10년] (2부-2) 미완의 기업 구조조정

■ '외환위기 그후 10년' 한국경제 좌표는 <제2부> 구조조정의 빛과 그림자<br>99년부터 싹튼 '모럴 해저드'에 발목<br>정부·은행·기업, 위기상황 넘기자 구조조정 등한시



지난 98년 6월17일 외환위기로 부실판정 대상에 오른 313개 기업 가운데 55개 기업의 퇴출이 결정됐다. 본격적인 기업 구조조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구조조정을 실시하지 않으면 퇴출 대상에서 빠진 기업도 생존이 어려울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이렇게 시작된 기업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30대 재벌 그룹 가운데 16개 그룹이 몰락했고, 수많은 가장들이 직장을 잃으면서 98년말 실업자는 180만명에 달했다. 대가는 혹독했지만 “국가 부도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속에 묻혔다. 하지만 99년부터 경기 호전으로 위기 상황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모럴 헤저드’가 싹트게 시작했다. 정부와 은행권, 기업들의 이기주의로 구조조정은 지연됐고, 경제 전체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상 초유의 사태 앞에 준비되지 않은 정부 정책도 문제였다. 부채비율 200% 이하 축소 등 획일적인 가이드 라인에 따른 부작용이 속출했고 구조조정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한 관련 제도는 정비되지 않았다. ‘어설픈 구조조정’은 결국 2000년 이후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 대우그룹의 공중분해, SK 사태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국경제를 반복적인 위기로 몰아넣었다.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기업 부실을 지목하고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대로 기업 구조개혁을 실시했다. 큰 그림은 이른바 ‘5+3’ 원칙이었다. 98년 2월 경영투명성 제고, 상호채무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업종전문화 가속화, 경영책임 강화 등 5대 핵심과제를 제시한 데 이어 99년 8월에는 순환출자 및 부당 내부거래 억제, 금융지배 차단, 변칙상속 방지 등 3대 보완과제를 내놓았다. 부실 기업의 처리는 크게 5개 방향으로 추진됐다. 회생 불가 기업은 퇴출시키는 한편 나머지는 ▦빅딜(Big Dealㆍ대규모 사업교환) ▦재무구조 약정을 통한 자체 정상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법정관리 및 화의 등으로 살리는 방안이었다. 사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의 기업구조조정 개입은 불가피한 ‘필요악’이었다. 성과도 컸다. 부채비율의 하락 등으로 기업 재무구조가 개선됐고 부실기업의 상시 정리체제 및 경영투명성 강화를 위한 각종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고동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기업 구조조정에 정부가 개입하긴 했지만 은행 스스로가 부실금융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기업관리를 철저히 하게 된 것은 성과”라고 평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도 2000년 5월 한국이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실시해 기업 재무구조, 신용등급 등에서 비슷한 시기 외환위기를 겪었던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보다 월등히 나은 성과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모럴 헤저드의 늪= 하지만 98년 하반기 이후 저금리로 기업들의 금융비용이 줄고 자산매각 등을 통한 구조조정이 일부 성과를 거두면서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다. 정부와 채권단, 기업 등 구조조정의 주체들이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구조조정을 등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99년말 제조업 외감법인의 4분의1에 해당하는 918개 기업이 영업 활동으로 금융 비용도 충당하지 못했지만 퇴출은 지연됐다. 기업 부채비율이 줄어든 것도 은행 빚을 줄였기 보다는 유상증자나 재산재평가 등을 통한 자기자본 확충 덕분이었다. 특히 회생이 불가능한 일부 대기업의 처리 방향이 문제였다. 재벌들은 구조조정을 이행하는 시늉만 했고 정부도 실업 증가와 부실채권 확대 등을 우려해 퇴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화의법, 회사정리법, 파산법 등 복잡한 기업정리 절차도 부실기업의 신속한 정리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전문인력의 부족 등 객관적인 한계도 존재했다. 그 결과 98~99년 워크아웃 기업으로 지정된 83개 기업 중 2002년 2월 정상화된 기업은 47개 기업에 불과했다. 당시 구조개혁기획단의 한 관계자는 “기업 내부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바람에 99년 이후 대우사태를 비롯해 쌍용차, 현대건설, 동아건설 등 대기업의 잇단 부도가 터졌다“ 며 “2003년 SK사태도 뿌리를 찾아보면 수술을 받아야 했던 기업이 내과 치료에 그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기업들이 사업 구조조정보다는 손쉬운 인력 감축을 선호하면서 사회 문제도 증폭됐다. 당시 빅딜 대상이었던 9개 업종의 경우 과잉설비 조정 정도를 반영하는 유휴자산매각은 6.6%에 불과한 반면 인력은 14%나 줄었다. 수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면서 경제 양극화가 심화됐고 소비 감소로 인한 내수 위축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98년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사무국장이었던 이성규 하나금융지주 부사장은 “당시 워크아웃이 주로 사람 자르고, 자산 팔아먹고 하는 데 중점을 뒀다” 며 “국부 관점에서 보면 총량이 늘어나기는 커녕 유지되지도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구조조정이 ‘제때,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정부가 지난 2000년 말 2차 구조조정에 들어갔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김용열 홍익대 상경대 교수는 “구조조정 초기 향후 발생할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희극이 된 ‘빅딜’= 어설픈 구조조정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5대 그룹을 주축으로 한 대규모 사업구조조정, 이른바 ‘빅딜’이다. “그나마 빅딜이 실패한 게 다행이었다”는 평가도 나왔지만 빅딜 시도는 그 자체로 한국 경제에 두고두고 큰 짐이 됐다. ‘빅딜(big deal)’은 미국 영어에서 ‘웃기고 있네’하는 식으로 상대방을 비아냥거리는 표현. 처음부터 “웃기는 발상”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DJ는 과잉 설비투자 해소를 위해 밀어부치면서 파장이 커졌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간 반도체 빅딜은 하이닉스 사태로 이어졌다. 부실 기업 2개를 합병시켜 더 큰 부실기업만 탄생시킨 꼴이었다. 삼성차와 대우차간 빅딜 논의는 무산되고 삼성차가 법정관리로 가 한국 재계에 후유증만 깊게 남겼다. 삼성종합화학과 현대석유화학간에 수년 동안 논의된 유화부문 빅딜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갔는데 이후 각 사 혹은 채권단 자율로 구조조정에 나서 성공한다. 물론 당시 DJ의 압력에 못 이쳐 LG반도체를 넘겼던 LG그룹 내에서조차 “빅딜이 당시 할수 있는 몇 안되는 정책 중 하나였다”고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빅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이종우 한화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빅딜은 그저 쇼에 불과했을 뿐 경제 체질강화에 아무런 도움이 안됐다”고 말했다. 장석인 산업연구원 주력산업연구실장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새 산업이 만들어지고 퇴출된 근로자는 새 일자리를 찾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실직자와 단순 자영업자만 양산이 됐다” 며 “현재 서비스업 생산성이 낮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어설픈 구조조정이 씨앗을 뿌린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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