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심층 진단] 대통령 불호령에도… 대책없는 기름값

혼합판매 등 재탕·삼탕에<br>실효성 없는 정책 되풀이


공공 부문 유류 공동구매는 소비자 기름값과는 직접적 연관 없어…

알뜰주유소 서울에 직접 지으려 하지만 정부 부지 중 활용 가능한 땅도 없어



두바이유 130달러 근접하면 전면적 유류세 인하 말고는 대안 없을 듯

대통령까지 나서 기름값을 잡을 구체적인 방도를 찾아보라고 불호령을 내렸지만 정부의 물가대책은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국제유가 상승을 극복할 묘책을 찾기 힘들다고 항변하지만 국내 석유 유통구조의 현실은 제대로 짚지 못한 채 재탕삼탕만 되풀이하고 있다.

정부는 이명박 대통령이 기름값 대책에 대해 "방관하는 듯한 인상"이라고 질타하자 지난달 29일 부랴부랴 기름값 유통구조 개선 대책들을 내놓았다. 알뜰주유소 공급 확대, 공공부문 유류 공동구매, 정유사 주유소 간 혼합판매 활성화 등 세 가지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대책을 위한 대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유류세의 경우 두바이유가 배럴당 130달러 이상 지속되면 선별 인하하겠다지만 이는 실상 현재로서는 인하계획이 없고 앞으로도 일반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의 인하는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나머지 대책의 방향은 석유 유통시장에 경쟁논리를 도입해 가격을 낮추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실효성이 없다고 확인된 것들마저 다시 테이블 위에 올랐다. '혼합판매 활성화'가 대표적이다. 혼합판매란 주유소들이 폴사인과 관계없이 값싼 타 제품을 섞어 판매하는 것이다. 주유소에 공급하기 위한 정유사 간 경쟁이 치열해져 리터당 20~30원은 낮출 수 있다고 정부는 계산한다.

하지만 실상 혼합판매 대책은 오래 전에 나왔다. 지난 2008년부터 추진됐지만 현장에서 외면당한 대책이다.

정부가 혼합판매를 놓고 진행해온 과거의 행적을 보면 기름값 대책이 얼마나 탁상공론에 머물러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08년 한 주유소에서 특정 정유사의 석유제품만 팔도록 하는 '상표표시제(폴사인제)'를 폐지했고 이어 2009년에는 정유사가 주유소에 자사 석유제품만 팔도록 강제하는 행위가 공정거래법에 어긋난다며 시정명령을 내렸다. 사실상 이때부터 혼합판매는 가능해졌다.

이어 공정위는 2010년 정유사와 주유소의 모범거래기준까지 만들어 혼합판매를 장려했다. 이 기준에는 폴주유소도 주유탱크 및 주유기를 분리하고 타 제품임을 표시하기만 하면 자유롭게 혼합판매가 가능하다고 명시돼 있다. 이 같은 조치로도 혼합판매가 활성화되지 않자 지난해에는 주유탱크 및 주유기 별도설치 규정마저 없애 사실상 모든 규제를 푼 상태다.


하지만 이 같은 대책에도 불구하고 혼합판매 주유소는 실제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는 혼합판매 정책 자체가 현장과 동떨어지고 실효성도 없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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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도 모르고 실효성도 없고=폴주유소 개인사업자들은 통상 정유사들로부터 시설지원 등을 받아 사업을 시작하고 지원의 대가로 해당 정유사의 기름을 공급받는 방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혼합판매 전환 자체가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또 오랜 기간 한 정유사와 거래했을 경우 구매할인 등 혜택이 많고 소비자들의 브랜드 선호도와 즐겨 이용하는 카드 혜택도 모두 정유사와 연계돼 있어 한 정유사와의 지속적인 거래가 더 유리한 게 현실이다.

주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폴주유소들이 현재 정유사와 1년 단위 전량구매 계약을 하는데 1년 후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정유사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에 혼합판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정부는 주유업계에 시장논리를 도입하겠다고 하는데 효율성을 위해 전량구매를 택하고 있다면 그것도 시장논리"라고 꼬집었다.

혼합판매가 실제 기름값 인하효과로 이어질지도 미지수다. 예컨대 폴주유소가 70%는 해당 정유사의 비싼 기름을 공급받고 30%는 저렴한 타제품을 쓴다면 가격을 그만큼 내려야 하는데 해당 정유사의 기름 가격을 유지한 채 이익만 높게 취할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또다시 혼합판매 활성화 방안을 짜내야 하는 공정위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공정위의 한 관계자는 "정유소와 주유소 간 사적 계약까지 공정위가 강제할 수는 없다"며 "앞으로 석유 전자상거래시장이 활성화되는 만큼 혼합판매에 참여하겠다는 주유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동 유류구매 효과도 미지수=이와 더불어 정부가 또 다른 대책으로 내놓은 공공부문 유류 공동구매 역시 소비자들의 체감 기름값에는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대책은 정부와 지자체ㆍ공공기관 등이 조달청을 통해 유류를 공동 구매, 가격을 낮추겠다는 것인데 일선 주유소들의 기름값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오히려 정유사들이 공공부문에서 줄어든 마진을 민간부문에서 되찾으려 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전가의 보도'처럼 내놓는 알뜰주유소 활성화 대책 역시 한계에 부딪혔다. 일단 서울과 수도권 등 수요가 집중되는 지역에서 알뜰주유소로 전환하겠다는 수요가 없는 것이 문제다.

정부는 여차하면 알뜰주유소를 직접 지을 계획이지만 최근 서울지역의 500㎡ 이상 정부 땅들을 전수 조사한 결과 주유소 설립이 가능한 부지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 관계자는 "미활용 행정재산, 공공기관 부지 등을 대상으로 알뜰주유소 설립 대상 부지를 추가로 물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국제유가가 오를수록 판매량이 많은 알뜰주유소의 기름값이 일반주유소보다 더 큰 폭으로 올라 가격인하 효과가 상쇄되는 것도 정부의 고민이다.

이에 따라 두바이유가 130달러에 근접할 경우 정부가 결국 전면적인 유류세 인하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시적인 대책만으로 기름값을 잡는 것은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고 지속되는 고유가가 소비자물가에 미칠 충격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윤홍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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