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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세대의 애환을 그린 영화 ‘국제시장’이 관객 700만명을 돌파했다. 할아버지가 된 주인공 ‘덕수’가 6.25전란때 흥남부두에서 생이별한 부친의 두루마기를 부여잡고 통곡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엔딩 장면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진 이들이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시에 바로 옆 거실에서 덕수 가족들이 노래를 부르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전후 세대의 희생과 고통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영화에선 정주영, 앙드레 김(김봉남), 남진의 젊은 시절이 등장해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고, 때로는 박장대소를 할 정도로 코믹한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영화 전편에 흐르는 감성 코드는 애절한 비애와 가슴 찡한 감동이다.
우직하게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덕수를 보며 고향집에 계신 부모님을 떠올린 자식들이 많았을 게다. 전쟁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산업화, 근대화를 이루는 도정에서 부모님 세대는 참 고생 많았다. 덕수처럼 광부로 외화벌이에 나서야 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국땅 베트남에서 원하지 않는 전투도 벌여야 했다.
진보세력 일각에서는 ‘국제시장’이 전체주의적 사고를 보여준다며 비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덕수 부부가 다툼을 하다가 국기 하강식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것을 애국심의 표현이라고 칭찬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때 그랬었지’ 하는 그저 오래된 흑백사진속 풍경이 한쪽에서는 애국심의 표출로, 또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주의의 횡포로 덧칠해지는 건 아닌지 씁쓸하다.
정치색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든 이 영화를 놓고 좌우 논쟁을 벌이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분열돼 있고, 또 나와 생각이 다른 쪽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아량이 바닥나 있다는 방증이다.
각자 영화 감상이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애국심을 고취하지도, 국가주의를 선전하지도 않았다. 영화의 실체적 진실보다 영화평을 한 누군가가 싫다고 편 가르기 싸움을 하는 건 사실 아무 사심없이 가족애를 느끼며 영화를 즐긴 국민들에 대한 모독이다.
지난달 미국 공화당 의원 보좌관인 엘리자베스 로튼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딸들의 복장을 비난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비판여론에 직면했다. 그녀는 “술집에나 어울릴만한 옷”이라며 “대통령 가족으로 품위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공식 행사에서 인상 쓰면 안 된다”고 했다. 이에 여론은 ‘아버지 정책이 싫으면 아버지를 겨냥해야지 선거로 뽑은 신분도 아닌 딸, 그것도 미성년자에게 할 말이 아니다’라고 로튼의 경솔한 처사를 질책했다. 결국 로튼은 사표를 냈다.
이처럼 정도를 벗어나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비난에 대해 사회 스스로 자정기능을 발휘하는 걸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만약 우리나라에서라면 어땠을까? 좌우를 막론하고 내 맘에 들지 않고, 내 편이 아니라면 공개석상이든 익명 인터넷이든 인신공격을 예사로 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게 우리 자화상이다.
사실 한국 사회의 편 가르기는 이미 도를 넘은 지 오래다. 가장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를 놓고서도 이념대립이 빚어졌다. 이념 갈등이 생길 수 없는 사건에서조차 진보 대 보수의 싸움이 전개되는 건 양쪽 다 국면을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만들려는 의도 탓이 크다. 문제는 이런 왜곡과 정치공학적인 행태에 대한 시민사회의 준엄한 꾸짖음이 또렷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규명하고, 검증된 사실을 왜곡없이 인정하는 것은 기본 중 기본원칙이 돼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지키는 ‘게임의 룰’을 엄수해야 한다. 성숙한 시민사회란 내 편이든, 반대편이든, 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 룰을 어기는 자에게 비판의 십자포화를 날리는 그런 곳이다.
청양의 해가 밝았지만 전망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당장 비정규직 문제, 저성장 극복 해법,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등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 산적해 있다. 사실을 조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거기서 출발해 대승적 논의를 하는 을미년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