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 커피 로고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여신, 검은 고딕체의 ‘스타벅스’라는 활자로 구성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두 개의 모순적 조화인데 그 요정이 다름 아닌 바다의 요정, ‘사이렌’이기 때문이다. 사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들의 영혼을 유혹해 육체마저 앗아가는 마녀이다. 그것은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난관이었고 현대 철학자들이 새로운 관념의 설정을 위해 넘어야 했던 절벽이기도 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유혹의 상징이 곧 사이렌인 셈이다.
모순적 조화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유혹의 여신을 스타벅이라는 이성의 대명사가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의 이름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 등장하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에서 유래했다. 열정과 집착에 눈이 먼 에이허브 선장과 대조적으로 스타벅은 이성적 항해를 주장한다. 그는 신의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과도한 열정이 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음을 우려했다. 세이렌이 유혹이라면 스타벅은 유혹의 저지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스타벅스 커피 회사의 로고는 이성과 유혹이라는 매우 아이러니한 상징의 결합이다.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유혹, 철저하게 구축된 이성의 마비란 과연 무엇일까. 스타벅스 커피가 얼마나 철저하게 조직된 유혹이었는지, 그 실체는 최근 인터넷상에서 격렬하게 오가고 있는 ‘된장녀’ 논쟁에 잘 드러나 있다.
20대 초반 여성의 무분별한 소비 행태를 지칭하는 ‘된장녀’라는 용어의 시작은 스타벅스 커피의 지나치게 비싼 가격을 비판하는 뉴스 보도였다. 뉴스의 의도는 스타벅스가 원가 대비 지나치게 높은 소비자 가격을 형성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의 폭로였다. 그런데 비판은 엉뚱하게도 가격을 책정한 전지구적 대기업이 아닌 그것을 소비하는 계층으로 우회했다. 스타벅스 커피를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인 젊은 여성이 비난의 주요 대상으로 책정된 것이다.
비난의 목소리는 주로 남성들에게서 유출된 바, 그들은 스타벅스를 애용하는 젊은 여성들을 합리적 소비 능력이 결락된 미숙아로 지칭한다. 커피 맛도 모르면서 이미지를 위해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여자들, 내용물이 빈 일회용 용기마저 소중한 액세서리로 들고 다니는 미련한 소비기계가 바로 그들이 말하는 젊은 여성들이다.
그런데 과연 스타벅스 커피 값의 논쟁이 그것을 소비하는 여성에게 향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성과 유혹으로 요약될 수 있는 스타벅스 커피 회사의 로고가 암시하듯 스타벅스 커피 전문점의 영업 방식은 세련됨의 이미지를 통해 확산되고 자리 잡았다. 엄밀히 말해 젊은 여성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좋아하게 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철저한 논리적 계획으로 이뤄진 마케팅과 홍보의 결과이다. 스타벅스의 영업전략이 그만큼 치밀하고 구조적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미지와 기호로서 자극하는 자본의 거대한 움직임, 그리고 기업의 전략적 음모를 개인의 취향과 선택으로 호도하는 시선들이다. 어떤 점에서 소비하는 자들을 비난함으로써 구조적 음모를 은폐시키는 것은 전략을 짜는 기업 입장에서 가장 원하는 반응일지도 모른다. 된장녀 논란 속에서 결여돼 있는 것은 그 유혹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구축된 전략이었는가라는 사실이다. 실상 문제는 시스템과 구조에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1905년 11월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당시 젊은 여대생들의 화려한 복색을 비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소비문화의 위협을 고작 여대생의 선택으로 의미화하려는 소극적 저항은 거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제는 누락된 진실, 그 내부를 파헤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