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2대 내각총수에 오른 이해찬(李海瓚.열린우리당) 새 총리는 여권의 대표적인 선거전략 및 정책통으로 꼽히는 5선 중진의원이다.
과거 총리직은 관료 출신이나 학계, 법조계 인사들이 독차지해 왔지만, 이 총리는 최초의 재야운동권 출신이자 전후세대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특히 지난 71년 박정희(朴正熙) 정권때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가 45세의 나이로 총리가 된 것을 제외하고는, 역대 총리 가운데 그가 최연소 총리가 되는셈이어서 참여정부 주요직의 세대교체 바람을 이어갈 전망이다.
이 총리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이래 청년시절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을 통해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섰던 투사였다.
특히 대학 재학중이던 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같은 당 김근태(金槿泰) 의원과 함께 투옥됐고 80년 소위 `김대중(金大中) 내란음모' 사건으로 또 한차례 영어의 몸이 되는 등 3년여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사회 진출 후에도 민청련 상임부위원장, 민주통일국민회의 정책실 차장, 민통련정책실 차장 및 부대변인,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 민주평화통일연구소장등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36살이던 88년 13대 총선을 통해 `제도권'인 원내에 진출한 뒤 서울 관악을에서만 내리 5선을 기록했다. 그 과정에서 97년 15대 대선의 여야간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2002년 16대 대선을 통한 참여정부 출범에 기여했다.
초선 시절 노동분야 입법활동에 주력,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이상수(李相洙)전 의원과 더불어 `노동위 3총사'로 불리는 등 눈에 띄는 활동을 펼쳤다.
88년 광주청문회 때에는 광주시민에 대한 계엄군의 살상 행위를 낱낱이 밝혀내는 `면도날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로서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지방자치가 도입된 95년 조 순(趙 淳) 서울시장 곁에서 정무부시장으로 행정경험을 쌓았고, 김대중정부 초대 교육장관으로 교육개혁을 진두지휘하며 강한 추진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개혁 추진 과정에서 교원정년 단축을 단행해 교육계의 반발을 샀고, 99년 학교교육 정상화를 위해 일선고교 야간 자율학습과 월간 모의고사를 폐지해 학력저하 논란을 낳기도 했다. 당시 그가 추진한 교육정책의 직접적 영향권에 있었던 고교생들을 일컫는 `이해찬 세대'라는 신조어도 이때 생겨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총리의 정책기획 능력을 높이 사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1번, 민주당 정책위의장 2번 등 정책위의장에만 3차례 기용했다.
95년 첫 지방선거에서 조 순씨를 서울시 민선시장에 당선시켜 선거전문가로서의능력을 발휘했고, 96년 15대 총선기획단장, 2002년 15대 대선 선대위 기획본부장, 2003년 우리당 창당기획단장 등 여권이 기획력을 필요로 할 때 항상 중심에 있었다.
앞서 우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천정배(千正培) 원내대표에게 석패했으나, 이번에 `일인지상 만인지하'라는 재상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셈이다. 매사 냉철하고 분명하게 처신하고 소신과 추진력이 강하지만 `독선적이고 깐깐하다'는 비판도 듣는다.
이번 국회 인사청문 과정에서 대부도땅 투기 의혹 등 도덕성 시비에 휘말리기도했으나 정책에 대한 뚜렷한 소신과 특유의 논리적 답변으로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인 김정옥(金貞玉)씨와 1녀.
▲충남 청양(52) ▲서울대 사회학과 ▲민청련 상임부의장 ▲13-17대 의원 ▲서울시 정무부시장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교육부장관 ▲민주당 정책위의장(2회) ▲민주당 최고위원 ▲2002년 노무현 후보 선대위 기획본부장
(서울=연합뉴스) 김화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