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내가 조선의 007 이로소이다

■조선직업실록

정명섭 지음, 북로드 펴냄

소방수·CSI·변호사·삐끼에 도련님 과거 대비 드림팀도 직업 통해 본 그때 그사람들

김홍도의 풍속화첩 중 활쏘기

신윤복의 쌍무대검 속 기생.

"내가 조선의 제임스본드다."

영국의 007 제임스본드는 첩보원의 대명사다. 멋진 정장을 입고 아름다운 본드걸과 파티장을 누비며 정보를 캐내고 기상천외한 무기들을 앞세워 악당들을 일망타진한다. 500년도 훨씬 전인 1430년대 한국. 이곳에도 '조선판 제임스본드'가 있었다. 이름하여 체탐인(體探人). 아름다운 본드걸이 없고 마티니 대신 막걸리를 마신다는 게 차이일뿐, 체탐인의 첩보활동은 제임스본드를 능가한다. 이들은 당시 국경 지대에 살며 조선의 국방을 위협하던 여진족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캐내는 일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매복해 있던 여진족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는 체탐인들도 많았지만, 이들이 입수한 정보는 다시 조선의 국경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체탐인이 나라의 녹을 받아 밥을 빌어 먹고 살았다면 곡비(哭婢)는 슬픔을 팔아 돈을 벌었다. 쉽게 말해 우는 게 직업인 것이다. 통곡소리가 있고 없고에 따라 상가(喪家)의 수준이 평가되던 시절. 체면을 중시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시원찮은 곡소리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 곡하는 여인을 고용, 슬픔을 샀다. 곡비라 불리는 이 여인들은 돈을 받고 초상집에서 며칠을 목을 놓아 울어댔다. 왕실은 곡비들의 가장 큰 고용주였다. 선왕의 장례식, 왕릉 이전에 곡비는 필수였다.

도련님의 대입합격을 위한 드림팀도 조선시대에 존재했다. 바로 '선접꾼-거벽-사수(혹은 서수)'조합이다. 조선시대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과거에 응시하는 양반들이 늘어나면서 시험장의 명당을 잡는 것도 경쟁이 치열해졌다. 선접꾼의 능력은 이 때 발휘된다. 이들은 시험장에 들어가 몸싸움 끝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거벽은 답에 쓸 문장을 구상했고, 사수는 거벽이 구상한 문장을 답안지인 시권에 옮겨 적었다. 수험생 도련님은? 이 환상의 복식조를 고용하는 '큰일(?)'을 하셨다.


조선시대 직업을 기껏해야 양반, 농부, 상인, 주모, 백정, 기생 정도만 생각했다면 실수다. 선조들의 밥벌이는 의외로 다양하다. '조선직업실록'은 각종 역사 문헌에서 발견한 조선시대의 직업 21개를 꼽아 이들의 탄생과 소멸, 에피소드를 조명했다. 그 속에서 당시의 생활상과 시대의 요구를 소설처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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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조선의 직업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했다. 1부는 나라의 필요에 의해 녹을 주고 부렸던 오늘날의 공무원 내지는 공기업 직원이다. 소방수의 역할을 하던 멸화군부터 첩보원 체탐인, 국과수 또는 프로파일러에 해당하는 오작인, 남자 대장금 숙수, 여형사 다모 등이 그 주인공이다. 국가의 정책에 따라 이들 직업이 어떤 흥망성쇠를 걷고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지를 읽은 재미가 쏠쏠하다.

2부는 자영업자들이다. 신문을 발행하던 기인, 변호사 외지부, 조선판 삐끼인 여리꾼이 그 주인공이다. 입을 도구 삼아 이야기를 들려주던 재담꾼도 있다. 유재석과 강호동이 조선시대로 돌아가면 그들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재담꾼이지 않을까. 그나마 재주가 있어 밥 굶지는 않는 자들은 행복한 편이다. 마지막은 먹고 살기 위해 그야말로 무엇이든 해야했던 슬픈 사연의 직업들이다. 상가에서 슬픔(곡)을 판 곡비부터 남의 매를 대신 맞아 돈을 벌던 매품팔이, 몰락한 양반가 아녀자들이 열었던 내외술집, 성(性)을 판 기생과 기생을 관리하던 조방꾼, 과거시험 명당을 골라주던 선접꾼과 대리응시자 거벽과 사수까지 다양하다.

이들 모두는 무엇을 팔아 돈을 벌든 저마다의 방식으로 경제활동을 했고,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조선을 먹여 살렸다.

저자는 "직업은 그 시대의 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에 특정 시대의 직업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사회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기억에서 잊혀진 조선시대의 직업을 통해 교과서가 미처 담지 못한 그 시대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드라마 '마의'를 소설로 옮기는 등 역사소설 작가로도 유명한 저자는 이 책에도 드라마적 요소를 가미했다. 각각의 직업을 소개하는 도입부에 소설 같은 토막글이 드어가 직업과 그 시대 사회상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직업 소개 말미에 그 직업과 관련된 옛 건물이나 고궁, 박물관, 유적지 등을 소개하는 배려도 돋보인다.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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