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외환위기 그후 10년] 무너진 '대마불사'

"97년엔 삼성전자도 망할 뻔했다"<br>무분별한 차입경영으로 한때 실질 자기자본 '0'<br>한보·기아 등은 결국 고비 못넘기고'몰락의 길'로<br>사업 다각화· '부채도 자산' 함정에 모래성 쌓은셈

기아자동차와 함께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됐던 한보철강 전경. 97년 부도가 난 한보철강은 2004년 현대제철에 인수돼 일관제철소로 거듭나고 있다. /서울경제DB



[외환위기 그후 10년] (2부-1) 무너진 '대마불사' ■ ['외환위기 그후 10년' 한국경제 좌표는] (제2부) 기업 구조조정의 빛과 그림자"97년엔 삼성전자도 망할 뻔했다"무분별한 차입경영으로 한때 실질 자기자본 '0'한보·기아 등은 결국 고비 못넘기고 '몰락의 길'로사업 다각화· '부채도 자산' 함정에 모래성 쌓은셈 김민열 기자 mykim@sed.co.kr 기아자동차와 함께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됐던 한보철강 전경. 97년 부도가 난 한보철강은 2004년 현대제철에 인수돼 일관제철소로 거듭나고 있다. /서울경제DB 관련기사 • '외환위기 그후 10년' 시리즈 전체보기 • 재벌 문어발식 확장의 두 얼굴 • [인터뷰] 유종근 당시 DJ경제고문 “외환위기 때 삼성전자도 망할 뻔했다. 국제화 열기에 도취해 무분별하게 차입경영을 추진한 결과 97년 삼성전자의 실질 자기자본은 제로가 됐다.” 한국의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조차 97년은 혹독한 한해였다. 95년까지 이어진 반도체 신화는 재벌 그룹들의 과잉투자에 기름을 부었다. 세계적인 공급과잉 조짐을 무시한 체 재벌 그룹들은 자동차와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조선 등 ‘중후장대’형 설치산업에 경쟁하듯 돈을 쏟아 부었다. 이들 산업이 훗날 혹독한 구조조정을 통해 한국경제를 이끄는 견인차가 되기는 했지만, 당시 에는 한국 경제를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재앙 속으로 내몬 악역을 톡톡히 했다. 신규시장에의 기업의 진입은 차입경영을 통해 무한대의 자유를 누렸지만 퇴출은 막히는 이상한 산업 구조가 남긴 결과는 너무나 혹독했다. 규모만 크면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는 97년 1월 한보를 계기로 무너졌다. 이어 진로, 대농, 기아, 한라 등 내로라 하는 재벌 그룹들이 한낮에 눈 녹듯이 사라져갔다. 최도석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 사장은 “국제화 열기로 95년부터 97년까지 3년간 자회사가 40개, 손자회사까지 합할 경우 72개 법인이 갑작스레 삼성전자 아래로 편입됐다”며 “그러나 인수한 이후에 제대로 된 관리를 할 수 없게 되면서 부실이 마구잡이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무분별한 대기업 차입경영은 ‘금융기관 부실’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IMF 구제금융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사업 다각화의 함정= 총자산 기준 재계서열 14위였던 한보철강은 비관련 다각화(conglomerate diversification)에 몰두한 나머지 4년동안 제약업, 금융, 건설, 조선 등으로 영위업종을 넓혀갔다. 기아차가 부도를 맞게 된 것도 무리한 투자로 기아특수강, 기산, 아시아자동차 등의 경영부실이 겹치면서 자금난에 빠졌기 때문이다. 삼성의 자동차, LG의 반도체 진출 등도 모두 비관련 다각화의 산물이다. 현대와 삼성의 경우 LG화학, SK㈜, 대림산업 등 선발주자들이 있는 유화업종에 막대한 설비투자를 통해 뛰어들었지만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부실기업 신세로 전락했다. 재벌 기업들의 과잉투자 결과, 96년 말 30대 재벌의 계열사 수는 821개사로 평균 27개 이상의 계열사를 보유했으며 영위업종도 평균 20개를 웃돌았다. 미국 500대 기업의 평균 영위업종 수가 10~11개 였던 것을 감안할 때 한국 재벌 기업들이 얼마나 업종 다각화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수년간 쌓은 ‘모래성’순식간에 물러나=97년 1월23일 한보철강 채권금융기관회의가 소집된 제일은행 본점 회의실. 신광식 제일은행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한보철강의 ‘부도’를 선언했다. 93년부터 4여년동안 상아제약, 삼화상호신용금고, 유원건설, 대동조선 등 특유의 로비력을 발휘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가던 정태수 회장의 요행은 여기까지였다. 부도당시 한보철강은 은행권 3조2,648억원, 제2금융권 대출과 사채 발행까지 합쳐 5조원이 넘는 대출금을 남겼다. 한보 부도는 단순한 개별 기업의 몰락이 아닌 국가 경제를 뒤흔드는 초대형 사건이었다. 한보사태가 터진 뒤 얼마 되지 않아 현지 일본계 은행들은 한보사태와 연루된 은행의 신용도를 문제 삼아 하루짜리 콜자금(오버나이트자금) 지원을 거절했다. 하루 결제자금의 60% 가까이를 콜자금에 의존하던 한국계 은행의 도쿄 지점들은 일제히 부도 직전에 몰렸다. IMF를 알리는 신호탄이 ‘한보’였다면 재계 서열 8위였던 기아의 부도는 가히 결정타였다. 한보 사태 이후 삼미특수강과 유원건설이 차례로 무너진 3월말에서야 한국의 외환사정은 진정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기아사태 처리가 3개월이상 늦어지면서 우리 정부의 위기대처능력은 도마 위에 올랐으며, 기아의 공기업화 결정(10월22일)은 S&P사의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을 야기시켰다. 진로, 대농, 한신공영, 쌍방울, 태일정밀, 해태, 뉴코아, 한라, 청구 등 내로라 하는 30대 그룹들이 97년을 넘기지 못하고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시장에서 과열기미가 있어 금리도 올리고 통화량을 줄여야 한다고 기업에게 말하면 좀 되려고 하는데 중앙은행이 재를 뿌린다고 난리를 쳤다”고 회고했다. ◇‘부채도 곧 자산’함정에 빠져=흥미로운 것은 90년대 중반 이후 멸망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익보다는 매출액에만 관심을 두다가 쓰러졌다는 점이다. 80년대까지의 쇠퇴한 기업들이 성장산업을 제대로 뒤따라가지 못한 원인이 컸다면, 90년대 말부터는 기업들의 무조건적 확장경영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셈이다. 한때 재계 1, 2위를 다투던 대우와 현대도 97년은 무사히 넘겼지만 예외가 될 수 없었다. IMF 체제로 들어선 뒤 부채비율 200%를 맞추지 못했던 대우그룹 계열사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현대그룹도 99년을 정점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외상 경영’이라는 자금조달 기법을 애용한 대우그룹은 물론 청구, 보성과 함께 주택업계의 ‘대구 3인방’으로 알려진 우방그룹도 주택경기 침체를 버텨내지 못하고 워크아웃에 이어 2000년 쓰러졌다. ‘부채도 곧 자산’이라는 김우중 회장의 말처럼. 당시 기업들이 주로 동원한 기법은 LBO(Leveraged Buy-out). LBO란 인수할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돈을 마련한 뒤 그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겉으론 ‘땅 짚고 헤엄 치기식’ 방법이었지만, 국내 인수합병(M&A)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이용돼왔다. 문제는 기아 사태이후 국내 은행들이 일제히 무장해제 당하며 자생력을 잃어다는 점이다. 97년 9월말 당시 25개 일반 은행이 6개월 이상 이자를 한푼도 받지 못한 무수익여신은 무려 21조5,000억원으로 전체 여신의 7%는 떼일 지경에 처해 있었다. 박영철 당시 금융연구원장(현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은 “우리 기업들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걸쳐 돈을 빌리는데 열을 올리면서 결과적으로 외국 자본들의 표적이 됐다”며 “외환위기를 구실로 삼아 미국 등 선진국들이 재벌기업을 위시로 한 구조조정을 해야 된다는 명백한 목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IMF에 ‘경제주권’을 넘겨주기 직전까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대기업의 연쇄부도는 국내 금융기관들을 모두 무장해제 시켰지만 정부는 어설픈 시장논리만을 내세우며 손을 놓고 있었던 셈이다. 입력시간 : 2007/01/1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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