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0년 동안 한국 산업계는 ‘황무지’에서 ‘숲’을 일궈왔다. 해방 후 당장 먹고 살 밀가루와 설탕을 만들던 기업들이 이제 반도체와 휴대폰 등 첨단 정보기술(IT) 산업과 중공업에서 세계적인 강자로 우뚝 솟았고 기업 수나 사업의 다양성, 경영실적과 글로벌 위상 등 모든 면에서 60년 전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왔다. 그 사이 격변의 현대 한국사와 궤를 같이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기업들도 무수히 많고 개발경제시대 이래의 정경유착, 불투명한 지배구조 등으로 반(反)기업 정서가 고조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들이야말로 국제원조로 간신히 먹고 살던 대한민국을 세계 13위 경제국으로 끌어올린 경제성장의 주역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온실에서 글로벌 무한경쟁 시장으로=우리 기업들이 본격적인 성장의 기반을 닦은 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다. 일본이 남긴 적산기업과 미국 원조물자를 토대로 제당ㆍ제분ㆍ면직 등 이른바 3백(白)산업이 성장을 끌어가면서 당시 삼양사가 재계 1위를 차지했다. 1960년대부터는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정책이 시작되면서 1980년대 후반까지 대기업의 고도성장이 이어졌다. 특히 철강ㆍ비철금속ㆍ조선ㆍ전자ㆍ화학ㆍ기계산업은 은행 돈으로 몸집을 급격하게 불려갔다. 정부의 비호 아래 재벌집단이 형성된 것도 이 시기. 현대ㆍ삼성ㆍ럭키금성ㆍ대우ㆍ선경ㆍ쌍용 등 당시 6대 기업의 연간 매출은 1973년 4,000억원에서 1980년 14조7,000억원으로 불어났고 계열사는 116개에서 308개로 급증했다. 성장 일변도를 걸어온 기업들의 행보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에 따른 노동쟁의와 임금상승, 시장개방이라는 안팎의 리스크에 맞닥뜨리면서부터다. 급기야 1997년 우리 경제를 강타한 외환위기는 국내 30대 그룹 가운데 16개 그룹을 몰락시키며 재계 판도를 크게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위기는 기업들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경쟁체제를 유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강제적인 체질개선의 계기가 됐다. 이후 10년간 반기업 정서와 경제여건 변화로 인해 기업가 정신이 꺾였다는 지적도 제기됐지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표방하는 차기 정부 출범과 함께 앞으로 기업 도약의 새 무대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가 고조되고 있다. ◇60년간 기업성쇠 거듭=삼성경제연구소에 1955년 100대 기업 가운데 2004년에도 재계 100위 내에 포함된 기업은 CJ(제일제당)ㆍLG화학ㆍ현대해상(동방해상보험)ㆍ한진중공업ㆍ대림산업ㆍ한화ㆍ한국전력 등 7개. 개발정책의 보호막이 걷히면서 본격화한 경쟁체제와 외환위기의 충격은 재계 지도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이들 흥망기업을 살펴보면 지난 60년간 우리 산업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경공업이 성장을 주도하던 1970년대까지는 금성방직ㆍ대한방직ㆍ삼양사ㆍ제일제당 등이, 1970~1980년대에는 수출드라이브정책에 힘입어 삼성물산ㆍ대우실업 등 종합상사와 현대건설ㆍ유공ㆍ호남정유 등 건설ㆍ정유사 등이 급성장했다. 이후 외환위기까지는 삼성전자ㆍLG전자ㆍ현대차 등, 그 후로는 이에 더해 삼성생명ㆍSK텔레콤 등 통신ㆍ금융업체가 위상을 높였다. 반면 1990년대 외환위기는 이전까지 수익성보다 외형 불리기에 급급했던 수많은 기업들을 시장에서 퇴출시켰다. 1997년 한해에만 한보철강ㆍ대농ㆍ청구 등이 줄줄이 문을 닫았고 ‘세계경영’으로 이름을 날리던 대우그룹은 완전 해체됐다. 하이닉스반도체 등 일부 기업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쳐 부실을 떨치고 시장에서 화려하게 재기하기도 했다. ◇글로벌 기업 도약…지속성장이 관건=김종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한국 기업의 가장 큰 변화는 경영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라며 “외환위기를 계기로 국내 기업들이 양적 성장에서 소프트경쟁력을 중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 위기 이후 국내 기업들의 외국인 지분이 급증함에 따라 기업 경영방식은 ‘영미식’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 빠르게 바뀌고 경영정보는 한결 투명해졌다. 이제 기업들의 관건은 기술혁신과 신사업으로 성장동력을 찾고 지난 10년간 뿌리 깊게 박힌 반기업 정서를 해소하는 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지난해 초 국내 기업이 “중국이 쫓아오고 일본이 앞서가는 샌드위치 신세”라며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수익성 회복에만 주력하고 투자와 성장을 등한시한 데 따른 위기의식을 강조한 바 있다. 김 연구원은 “국내 기업들은 여러 국내외 위기를 겪으면서 내성이 길러진 상태”라며 “이를 폭발적인 성장활력으로 끌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관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