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송현칼럼] 노사관계 지평 위에 떠 오른 제3노총

새로운 노동운동을 표방한 '새 희망 노동연대'가 제3 노총의 형태로 한국 노사관계의 지평 위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필자는 연초에 우리 노사관계의 새 지평을 여는 문제와 관련해 이들에게도 주목했지만 이렇게 빨리 제3 노총으로 나아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 다가온 복수노조 시대의 개막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반응은 '역시나' 이분법적이다. 한편에서는 우리 노사관계의 지형을 바꿔 놓을 것을 기대하면서 환영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명분조차 인정하지 않고 냉소를 퍼붓는다. 어느 쪽이든 자기의 프레임으로 예단하거나 재단해 버릴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행보를 지켜보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유불리(有不利)를 시비(是非)로 포장해서는 곤란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명분은 분명히 있다. 결사의 자유라는 이론적인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기존 양 노총의 과두 지배체제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를 지양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물론 노동계는 하나로 뭉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분화를 통한 통합이지 반대는 아니다. 복수노조 시대가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분화로 출발할 것이라고 본다면 노총 차원의 분화 역시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분화가 통합으로 이어지는 것은 변증법적 법칙이 아니라 목적의식적인 노력에 달려 있다. 상생협력의 노사관계를 지향한다고 해서 이를 '어용'으로 몰아붙여 명분마저 박탈하고자 한다면 그건 단세포적 발상에서 비롯된 전횡에 다름이 아니다. '상생'이야 공자 말씀이지만 '협력'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고난에 찬 과정인지는 협력을 투항으로 치부하는 투쟁의 단세포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이 단세포가 상생에는 암세포가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는 현실이다. 노조 간부를 위한 노조가 아니라 조합원을 위한 노조라는 명분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명분이 아니라 실제다. 현시점의 우리 노사관계에서는 오히려 명분이 문제이며 명분과 실제 괴리는 우리 노사관계 합리화의 길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다. 전투적 실리주의나 정치적 모리(謀利)주의는 그 결정판일 것이다. 제3 노총을 추진하는 세력은 무엇보다 이 점을 명심하고 자기점검을 다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명분보다는 실제 보다 정확하게는 명분과 실제의 합치여부를 통해 제3 노총의 전부가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평가가 제3 노총의 존립에 결정적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제3 노총으로의 행보에 말을 아끼거나 침묵하고 있는 다수도 바로 이 점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상생협력의 노사관계' '조합원 위주의 노조'. 명분으로 충분하고 말은 쉽지만 실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동안 진통을 통해 새로이 각오를 다진다 하더라도 경로 의존성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부에 상생협력의 철학이 확고하게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지 조합원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시계(視界)가 길어졌는지 스스로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추진 주체들은 노조 간부로 출셋길을 걸을 것인지 사심 없는 지도자의 가시밭길을 걸을 것인지도 결단해야 한다. 명분과 실제가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제3 노총으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기존 양 노총의 독과점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 물론 그동안 어느 정도는 다져졌겠지만 복수노조 시대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지형 변화에 적극적인 현장의 열기가 충분히 모아져야만 그들 앞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명분을 팔아 손쉬운 길을 택할 유혹에 흔들릴 수 있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간부는 있지만 지도자가 없이는 '작업'에 넘어갈 위험도 커진다. 이는 단연코 명분과 실제의 괴리로 귀결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흔들리다 넘어갈 경우 제3 노총은 지형을 바꾸기는커녕 벽도 넘지 못하고 발도 딛지 못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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