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 같은 선진국에서 여행하다 보면 부럽게 느껴지는 것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광활한 고속도로와 도시를 에워싼 순환도로(Belt Way)다. 미국의 경우 고속도로의 총 길이가 지구 둘레의 150바퀴에 해당되는 600만㎞에 달하고, 인구 50만명이 넘는 도시에는 어김없이 순환도로가 있어 시내를 통과하는 차량이 최소화되고 있다.
유럽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벨기에 수도인 브뤼셀을 예로 보면 링(Ring)이라 불리는 순환도로가 주요 간선도로와 맞닿아 사통팔달을 이룬다. 링 외곽에 위치한 공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도로의 주요 구간이 지하로 뚫려 있어 교통체증 때문에 조바심을 내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들 나라의 주소 체계 또한 편리하다. 어디를 가나 도로 양측이 짝수와 홀수로 배열돼 있어 지도 한 장만 있으면 처음 가는 곳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부러운 것은 운전자들의 질서 의식이다. 옆 차선에 차선변경 신호를 주면 속도를 줄이면서 양보하는 것은 기본이고 인적이 드문 새벽시간에도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린다.
신호등이 없는 한강변의 올림픽대로조차 막히지 않을 때가 거의 없고, 약속시간에 늦으면 교통사정을 설명하는 일이 예사스러운 일이 된 우리에게는 ‘선진국은 다르구나’ 하는 느낌이 저절로 든다. 편하고 자유롭고 예측 가능한 만큼 다시 오고 싶은 나라로 기억하게 되며 투자를 해도 안전하겠다는 신뢰감을 갖게 된다.
물론 세계적인 거대 도시인 서울의 교통사정을 이들 나라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없지 않다. 좁은 면적에 많은 인구가 밀집해 사는 우리가 선진국과 같은 도로망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또 갈 길이 바쁜 도로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성숙된 모습의 시민의식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미국ㆍ유럽과 우리나라의 상반된 모습에서 필자가 새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선진국 진입에는 경제와 산업의 발전 못지않게 의식과 제도상의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우리나라는 선진국 진입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후의 폐허에서 출발한 우리는 불과 60년 만에 세계 12위 무역국이자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해방 직후 300만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은 올해 3,00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경제개발이 본격화하기 전인 지난 61년 82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해 1만5,900달러로 늘어났다. 국제기구에서 분석한 구매력평가기준 1인당 소득은 이미 2만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선진국이란 단순히 경제적 덩치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업구조, 기술수준, 고용과 분배 등의 질적 요소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며 거기에 알맞은 사회질서와 의식수준의 향상이 필요하다. 사회질서와 의식이 낮은 수준을 맴돈다면 경제와 산업이 발전하기 어렵고, 경제가 정체돼 있는 상황하에서 사회질서와 의식수준의 올바른 변화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 두 가지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균형을 이뤄야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데 이점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다.
우리가 선진국, 삶의 질이 높은 신용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의식의 선진화이다. 법과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 사회 일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 인식돼야 한다. 국민들은 행정을 신뢰하고 행정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행정을 펴야 한다.
제도의 선진화 또한 중요하다. 학교에서 아무리 질서교육을 강조해도 버스 정거장에서 지정된 장소에 버스가 서지 않고 딴 곳에 서게 돼 뒷사람이 먼저 타면 질서교육은 허사가 되고 만다. 인적이 드문 새벽이라도 신호를 위반하면 어김없이 벌금고지서가 나온다는 것을 체득한 경우 사람들은 신호를 지키게 마련이다.
한국 사람도 미국에서는 신호를 어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신호를 무시할 경우 언제 어디서나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점에서 의식과 제도는 사람이 바뀌어도 정해진 규칙에 따라 변함없이 작용하는 시스템으로 정착될 때 진가를 발휘한다고 하겠다.
진정한 선진국은 일류 국민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 있고 일류 국민이 되려면 일류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일류의 사회질서와 시민의식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너와 나, 상하가 따로 없이 선진 신용사회를 이루기 위해 제도를 다듬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