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통화주의 학파 창시자' 프리드먼 타계] 그는 누구?

20세기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br>"성장동력은 정부 간섭 줄인 시장의 자유" 주창<br>닉슨에서 레이건까지 美공화당 경제이론 제공

‘자유주의 경제학’의 큰 별이 졌다. 16일(현지시간) 94세를 일기로 타계한 밀턴 프리드먼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케인즈 학파’에 대항해 시장을 강조하며 ‘애덤 스미스’를 다시 부활시킨 20세기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였다. 특히 ‘통화공급 조절을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와 ‘최소한의 규제를 통한 효율의 극대화’ 주장은 80년대 ‘레이거노믹스’의 근간을 이루며 경제 부흥을 이룩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통화, 권력 집중은 자유의 위협’=프리드먼이 원래부터 자유주의를 신봉한 것은 아니다. 프리드먼의 출발점은 케인즈학파였다. 하지만 케인즈이론이 30년대 대공황의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시장에 눈을 돌렸다. 그는 세계경제가 공황에 빠진 것은 경제활동이 위축됐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이 잘못된 통화정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통화량을 늘려 경기 활성화를 꾀해야 했지만 정부가 오히려 공급을 줄여 극심한 신용경색을 야기했다는 분석이다. 이로 인해 통화교란이 생기고 결국 이것이 파국을 불렀다고 역설했다. 프리드먼은 이를 “통화가 정말 중요하다”와 “인플레이션은 통화적 현상이다”는 두 마디로 표현했다. 그를 ‘통화주의자’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또 이 같은 상황은 프리드먼으로 하여금 정부의 역할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경제성장의 가장 큰 동력은 ‘시장의 자유’이며 정부의 간섭은 ‘최소한’으로 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권력의 집중은 자유에 대한 위협이며 역사가 이를 확인해 준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프리드먼은 정부 권력을 ▦법과 질서 유지 ▦사유재산 보호 ▦계약의무 이행의 보장 ▦통화제도 유지 ▦시장 경쟁 촉진 등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필요악’으로 봤다. ◇‘닉슨에서 레이건까지’ 공화당 경제이론 제공=프리드먼의 이론은 세계 최강국 미국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 프리드먼이 대선 참모로 참여했던 70년대 리처드 닉슨부터 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에 이르기까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집권한 시절 대부분의 경제정책이 그의 이론을 근간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레이건 정부 때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80년대 미국경제의 화려한 부활을 이끈 ‘레이거노믹스’를 진두지휘했다. 이와 관련, 후버연구소에서 같이 일했던 마틴 앤더슨은 “그의 이론은 레이건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으며 그러한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며 “이것이 ‘레이거노믹스’가 됐다”고 말했다. 그의 이론은 미국에만 멈춘 것이 아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역시 재임 시절 “밀턴 프리드먼이 모두에게 잊혀졌던 자유의 경제학을 되살렸다”며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경제정책을 운용하기도 했다. 한편 프리드먼은 거시경제ㆍ미시경제ㆍ경제사 등의 분야에서 50여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66년부터 83년까지는 뉴스위크에 고정 칼럼을 기고하는 등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몇 안되는 경제학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 프리드먼 약력 ▦1912년 뉴욕 출생 ▦1932~33년 러트거스대학 졸, 시카고대 석사 ▦1946년 컬럼비아대 박사 시카고대 경제학 교수(~76년) ▦1956년 '화폐총량이론에 대한 연구' 발간 ▦1968년 대선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경제자문 ▦1967년 미국 경제학회장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1980년 대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경제자문 ▦1981년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 ◇주요 저서 ▦통화총량이론에 대한 연구(1956년) ▦소비기능이론(1957년)' ▦자본주의와 자유(1962년) ▦미국의 통화사, 1867~1960(1963년) ▦자유에서 선택까지(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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