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 회장] 54.모스크바에서 만난 사람들

나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아름다운 경관이나 역사적인 유적, 유물들을 둘로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잊지 않고 챙겨보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나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삶을 보면 관심사가 무엇인지, 생활형편이 어떤지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 갔을 때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매우 다양했다. 도서박람회 조직위원들, 한국학 교수들, 출판관계 인사들, 구소련 공무원, 고려인 동포, 호텔 종사자와 택시 기사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대부분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생활이 어려우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젊은 여성들이 몸으로 돈 버는 일이 가장 쉽다고 하는데 모스크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텔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젊은 여성들이 그러했다. 노치근씨와 김 니콜라이씨는 자기 집으로 우리 일행 중 몇몇을 초대했고 우리도 그들을 한국으로 초청한 적이 있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노치근씨는 사연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대학을 다니다가 모스크바로 유학을 왔다. 그러다가 현재의 부인을 만나 연애를 하게 됐는데 유학생을 감시하는 북한 감시원의 눈을 피하려다가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조국 북한을 배신했다 하여 함께 유학 왔던 친구들로부터 감시 대상자가 되어 직장도 못 구해 초기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부친은 남한이 고향인데 자기가 소련 여성과 결혼해서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님도 몹시 고생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는 사람들을 통해 북한의 부모님과 몇 번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부친이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내 뼈를 압록강에 뿌려 달라. 강물 따라 흘러 흘러 남한 땅 고향 가까운 곳에라도 가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의 평생 소원은 아버지를 대신해 남한 땅에 가 보는 것이라며 섧게 울었다. 우리 역시 감동해서 귀국 후 가능하면 초청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귀국한 뒤에 우리는 약속대로 노치근씨를 초청했다. 그는 한국으로 올 때 필요한 가전제품이며 의복ㆍ두 아들의 운동화까지 모든 것을 수첩에 적어오는 치밀함을 보였다. 초청자인 우리는 숙식비를 포함해 가급적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구입해 주고 십시일반으로 비용을 부담했다. 귀국할 때 그의 짐은 TV를 비롯한 가전제품과 의류ㆍ신발 등 작은 트럭으로 한 트럭분이나 됐다. 그리고 공항에서 그 많은 짐을 모스크바까지 부치는 비용은 물건 구입가보다 더 많았지만 그 비용 역시 초청자인 우리가 부담했다. 노치근씨는 그 후 재외 한국인 초청대회 때 고려인 여성 나타샤와 함께 통역으로 두어 번 더 한국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를 찾아오면 그가 필요하다고 적어온 물건을 구입해 주곤 했다. 노치근씨 외에도 끈질기게 한국 방문을 요청해온 사람은 한의사 김 니콜라이였다. 모스크바에서 비교적 넉넉하게 사는 김 니콜라이는 한국의 침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초청했다. 한국에는 그가 아는 사람이 없다 보니 초청자인 내가 후견인이 되어 그의 숙식비 등 모든 것을 책임졌다. 그는 2개월 동안 종로에 있는 침술학원에 다녔다. 노치근씨나 김 니콜라이를 초청하고 그들의 숙식비며 용돈이며 선물까지 구입해 준 것은 특별히 공치사를 받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들이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다는 듯이 행동할 때는 조금쯤 언짢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들은 같은 동포로서 잘 사는 동포가 못사는 동포를 돕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이었다. 아마 그런 생각은 개인의 소득보다 공평한 분배를 우선하는 공산주의식 사고방식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소련도 민주화됐으니 내가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만나 보지 못한 모든 고려인들이 속히 경쟁의 원리를 깨우쳐서 열심히 잘 살기를 기원한다. <안길수기자 coolass@sed.co.kr>

관련기사



안길수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