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토요Watch] 고군분투 '자발적 잉여세대'

"제대로 삐뚤어질테다" 세상을 향한 유쾌한 반란<br>입시→대학→스펙→취업→결혼 틀 깨고 무전여행·블로그 동영상 제작 통해<br>나만의 규칙으로 살아가는 법 개척<br>구속되지 않은 즐거운 상상·엉뚱함 또 다른 창조미래 이끄는 힘으로


'이기는 병신이 되자.'

지난 14일 개봉한 영화 '잉투기'의 포스터 문구다. 영화 제목인 '잉투기'는'잉여들의 격투기'라는 의미다. 여기서 '잉여'는 부유(浮游)하는 오늘날의 청춘을 대변하는 말이다. 잉여의 사전적 의미는 '다 쓰고 난 나머지'다. 오늘날 이 말은 입시→대학→스펙 쌓기→취업→결혼이라는 라이프사이클에서 이탈한 쓸모없는 사람 또는 아직 이렇다 할 결실을 얻지 못한 타인이나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20∼30대 미혼 4명 중 1명이 자신을 잉여세대라고 인식한다(서울시여성가족재단 조사결과)"는 통계가 방증하듯이 잉여라는 말은 20∼30대의 보편적 존재양식을 드러내는 상징어 중 하나가 됐다.


우리 사회에서 잉여라는 말의 처음 등장한 것은 1958년 손창섭의 단편소설 '잉여인간'에서다. 소설 주인공 서만기는 치과의사인데 그의 병원에는 중학교 동창인 채익준과 천봉우가 날마다 찾아와 한담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모두 전후(戰後) 암울한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무기력한 잉여인간들이다. 최근 우리 사회 잉여의 개념은 좀 더 의미가 넓고 다양해졌다. 비정규직은 물론 청년백수와 88만원 세대까지 제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남는 인간'을 아우르는 표현이 됐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과거 10명이 할 일을 혼자 떠맡게 된 사람이 과로로 죽어가는 동안 다른 9명은 손가락을 빨고 있고 누군가가 과로로 쓰러질 때만 나머지 9명 중 1명에게 과로할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이다."

이는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이라는 부제로 9월 출간된 '잉여사회'에 담긴 한 구절이다. 지나치도록 많이 배웠지만 이를 마땅히 활용할 만한 곳은 충분하지 않다. 사회가 차고 넘치는 고급인력의 활용과 적절한 노동분배에 대한 뾰족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 청춘들은 스스로를 잉여라 칭하며 부유하고 있다.


차고 넘쳐 '남아도는 인생들'은 현재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어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법을 개척하며 분투하고 있다. 혹자는 스스로를 잉여라 칭하며 남과 조금 다른 삶을 부러 선택하기도 한다. '자발적 잉여'를 자처한 이들은 대신 삶에 대한 막연한 자조로 그치지 않고 뚜렷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세상과 맞서고 있다. 젊은 세대를 절망과 낙오로 밀어내는 우리 사회의 서글픈 현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잉여라 자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패기를 바탕으로 나름의 성장과 성취를 이뤄내는 모습이 공존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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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두 편의 영화는 오늘날 잉여들이 어떻게 세상 밖으로 나와 호흡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14일에 개봉해 호평 받고 있는 영화 '잉투기'는 현피(온라인상에서 다투던 이들이 실제로 만나 싸우는 것)를 다룬 영화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칡콩팥'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20대 후반 실업자 태식(엄태구 분)이 느닷없이 찾아온 라이벌 '젖존슨'으로부터 구타 당한 후 복수를 다짐하며 분투하는 내용이다.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독특한 이 영화는 목표도 투지도 없이 살아가는 잉여 폐인들이 가상공간, 익명의 가면을 벗고 현실공간에서 비로소 맞서면서 이야기가 무르익는다. 2011년에는 잉투기 대회가 실제로 열렸다.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격투기 갤러리 이용자들이 인터넷상에서 서로 상처 주지 말고 오프라인에서 맞서자는 취지에서 마련한 자리다. 엄태화 감독은 이 대회를 연 관장과 참가한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그 이야기를 상당 부분 영화에 반영했다. 엄 감독은 "기성세대의 눈에는 한낱 쓸데 없는 짓에 지나지 않지만 이 대회에 임하는 이들은 진짜 진지하게 열심히 하고 있었다"며 "세상 밖으로 나와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영화는 어설픈 위로나 교훈을 건네기보다 부유하는 청춘들이 쏟아내는 분노가 어디서 오는지 들여다보고 이들이 세상을 향해 독특한 형태로 뱉어내는 행동과 이야기를 통해 조심스레 희망을 말한다.

28일 개봉한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칭하는 20대 초중반 백수 청년 네 명의 무전(無錢) 유럽 여행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들은 여름방학 동안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나름의 시간을 투자하지만 목표액수의 반도 채우지 못한다. 학교 등록을 포기하는 대신 이들은 유럽 여행을 도모한다. 침대에서 뒹굴며 구상하는 여행계획은 야심 차다 못해 꽤나 무모하다. 단돈 80만원, 카메라와 노트북만 들고 물물교환으로 1년간 유럽을 여행한다는 계획이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이들은 유럽 현지 숙박업소의 홍보 동영상을 찍어주는 대가로 숙식을 해결하고 마지막 여행지로 록의 고장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제2의 비틀스'가 될 유망 뮤지션과 만나 세상을 놀라게 할 그들의 데뷔 뮤직비디오를 만든다는 것이다. 궁극에는 이 모든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엮어 영화로 개봉한다는 포부였다. 물론 현실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네 명의 '자발적 잉여들'은 단순히 수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진 열매를 얻었다. 돈을 벌지 못하면 '비생산적 잉여'라 칭하는 주류의 시선에 과감히 반기를 들고 '입시→대학→스펙 쌓기→취업→결혼'이라는 틀을 깨며 새롭고 의미 있는 길을 개척한 것이다.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오늘날의 잉여는 단순히 시간이 남아도는 혹은 쓸모없는 등의 의미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창조적이고 엉뚱한 상상이 가능한 이들을 지칭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특히 스스로 잉여임을 자처한 자발적 잉여세대는 단순히 자조와 체념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해법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잉여를 비주류로 묶어 가두기보다 이들이 지닌 유쾌한 반란, 전복의 기운에도 주목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유튜브 등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나 블로그에는 각종 이미지 파일이나 두세개의 기존 콘텐츠를 나름의 편집기술로 짜깁기해 만든 UCC(사용자가 직접 제작한 영상)들이 많이 올라온다.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이 같은 '제2의 콘텐츠'를 두고 누군가는 시간낭비라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쓸모 없어 보이는 소위 '잉여짓'도 낭비가 아닌 창조의 힘이 될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신경정신과)는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이 인터넷이나 보면서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소문만 양산한다고 혀를 차지만 이를 달리 볼 필요도 있다"며 "지금의 '잉여로움'은 자조적인 허세나 세상회피가 아니라 엉뚱하고 즐거운 상상을 하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또 "단순히'얼마를 번다, 벌지 못한다'가 아니라 잉여세대이기에 가능한 것이 있고 스스로를 잉여라 지칭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이 같은 자발성과 엉뚱함은 창조적 미래를 이끄는 힘이 될 여지가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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