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철강의 위탁경영자로 선정됐던 박득표 전포철사장이 갑작스레 바뀐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포철이나 통산부 재경원 등의 해명이 있었지만 궁색하게 들릴 뿐이다.우리가 위탁경영자 선정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첫째는, 한보를 살려서 국민경제에 주는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제3자의 눈을 통해 한보철강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파헤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 때문이다.
한마디로 위탁경영자의 역할은 단순히 한보철강의 마무리 공사나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중차대한 것이며 한보철강의 장래와 유사사건의 재발방지 여부가 위탁경영자의 솜씨에 달려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가 철강산업의 베테랑인 박득표씨를 위탁경영자로 선정했을때 업계에서는 그같은 기대를 품었다. 박씨도 포철출신의 전문가들과함께 한보철강의 경영상태를 점검하는등 의욕을 보였다. 박씨팀이 내놓은 1차보고서는 한보철강에 2조원 정도의 과잉투자가 이뤄졌고 공장을 완공하려면 2조원이 추가소요되며 완공되더라도 상당기간동안 적자를 면할수 없다는 등의 매우 비관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박씨팀은 위탁경영의 조건으로 정부 특단의 자금지원 조치와 함께 인사 및 경영권 보장 등을 요구했으며 정부와 채권은행단도 이를 수용할 의사를 비치다가 갑자기 교체한 것이다.
박씨의 교체는 박태준 전 포철회장의 발언과 무관치 않아보인다. 정치논리의 개입이라는 시각이 설득력이 있다. 최근 해외에서 귀국한 박 전회장은 『한보철강의 부실은 일찍 예견된 것』이라면서 『경제성이 검증되지도 않은 신공법의 사업인가를 정부가 내준것부터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측은「박태준 사람들」로 알려진 박사장팀이 위탁경영을 맡을 경우 박 전 회장의 입김을 받을 가능성이 있고 이들의 위탁경영이 결국 정책의 오류를 파헤치는데 치중하지 않을까 우려했다는 것이다.
정부와 포철측은 이를 극구부인하고 있으나 교체의 전격성과 앞뒤가 안맞는 설명으로 비추어 그 개연성은 상당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통산부는 한보철강의 사업승인부터 수상쩍었던 터에 수습책마저 아리송해 두번 실책을 범하고 있다.
한보부도는 현재 검찰에서 정치권 등의 외압혐의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은행장이나 국회의원 몇사람을 구속하는 것으로 유야무야돼서는 안될 사안이다. 그렇게 될 경우 이는 수서사건의 재판으로 끝나고, 같은 비리는 재발하고 만다. 한보부도에서 규명돼야 할 것은 투자에서 생산에 이르는 전체 인허가 과정의 구조적인 비리를 밝혀내는 것이다. 규제의 칼자루를 틀어쥔 관료조직은 모든 비리의 출발점이다. 관료조직의 방대함과 규제의 크기에 비할때 은행장이나 국회의원은 조연급이다. 제3자에게 경영을 맡긴다는 것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이같은 정책의 오류를 파헤칠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이 일을 해낼수 있는 사람은 전문적인 지식은 물론,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원칙에 투철한 사람이어야 한다. 박득표씨가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기에 교체되었다면 이는 범죄은폐행위에 해당된다. 세간에는 포철의 정기주총을 앞두고 물러날 임원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보다 고분고분한 인사로 위탁경영자를 바꿨다는 말까지 떠돌고 있다. 이같은 말이 사실이라면 한보철강 위탁경영은 기업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두번 죽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