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소라의 '왜냐고 묻지마(Don't ask me wh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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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형 계단 너머에 어른 키보다 훨씬 큰 숫자 3이 서 있다. 숫자 7은 쓰러진 나무 아래 깔렸고 4는 기우뚱 넘어져 있다. 1과 2는 반듯한데 숫자 5는 좌우가 뒤집혔다. 스피커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설거지 소리나 닭 우는 소리 같은 일상 소음이 흘러나온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 영문을 알 수 없는 광경이 당혹스럽다. 개념미술가 김소라(45)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신사동 아틀리에 에르메스의 풍경이다.
이번 전시는 특이하게 제목도 '없다'. 심지어 전시장 초입을 채운 작품의 제목은 '왜냐고 묻지마(Don't ask me why)'. 11개의 숫자와 64개 스피커, 16가지 소리 등으로 이뤄진 설치작품이지만 숫자가 가진 문화ㆍ역사적 상징이나 해석을 요구하지도 찾지도 말자는 얘기다. 일반 관람객이라면 '뭘 보고 어떻게 감상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릴 수 있는, 조금은 불친절하고 어려운 전시다.
하지만 이 난해한 무질서가 실마리다. 관객이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는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언어로 규정된 분명한 것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작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설명할 필요도 없는 본질'을 제시한다. 그는 "원래 기획은 더 무질서한(chaotic) 것이었다"며 "방향성이 없는 대신 관객이 자신만의 관점에 충실하게 자유로이 느끼면 된다"고 말했다. 창의적인 관람객이라면 작가가 생각한 그 이상도 볼 수 있다.
작가는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와 25년 베이스비엔날레 한국관을 비롯해 세계 각지 비엔날레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전시는 12월5일까지. (02)544-7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