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미국, 오바마 시대] 미국 흑인 정치사

"Dream come true"<br>남북전쟁이후 의회진출…1920년대까진 투표권 제한<br>60년대 킹목사 민권운동후 정치참여 움직임 활기<br>현실의 벽 여전히 높아…민선 정치인은 극소수


‘미국 흑인들의 꿈이 이뤄졌다.’ 미국 흑인 사회가 온통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난 1619년 노예 신분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후 온갖 고난과 차별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미국 주류사회에 도전해온 흑인들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미국 흑인 정치사는 험난한 길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좌절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끊임없는 도전해온 흑인 정치인들이 있었기에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흑인들의 본격적인 정치참여는 남북전쟁(1861~1865년)에서 북군이 승리,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후 시작됐다. 남북전쟁 이후부터 1877년까지 수백명이 지역 및 주 정부에 참여했고 상원의원 2명을 포함해 16명이 의회에 진출했다. 최초의 흑인 상원의원은 공화당 출신으로 1870년 미시시피주에서 당선된 히람 레블스. 1870년부터 1901년까지 남부의 루이지애나주와 미시시피주, 앨라배마주, 조지아주, 플로리다주 등 8개 주에서 1명 이상의 흑인 의원이 배출됐다. 흑인들의 정계 진출이 잇따르자 백인 우월주의를 꿈꾸는 ‘KKK’단의 테러 등 반발도 적지 않았다. 흑인들은 1920년대 말까지 투표권이 제한되면서 정치 참여가 크게 위축됐다. 흑인 정치사에 큰 변화가 온 것은 대공황이 미국을 휩쓴 1930년대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텃밭이었던 흑인 사회가 민주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계기로 민주당 지지우세로 돌아섰다. 1963년에는 흑백차별에 항거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명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가 나오는 등 흑인 민권운동에 불이 붙으면서 흑인들의 정치 참여 노력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1972년 셜리 치점 전 연방 하원의장이 민주당 대선후보에 도전한 것을 시작으로 제시 잭슨 목사가 1984, 1988년 민주당 경선에 출마했고 심리학자 레노라 풀라니가 1988, 1992년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하는 등 흑인들의 정치 진출과 대권 도전이 다시 활발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의 벽은 높았다. 흑인 인권운동가 맬컴 엑스와 킹 목사가 암살됐고 흑인 대선 후보들은 번번이 본선에도 못 오르고 낙마했다. 아직까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정치적 위상은 초라하다. 전체 인구 가운데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3%이지만 연방 하원에 진출한 흑인의원은 42명으로 전체 435명의 10%에 불과하다. 상원의원 100명 가운데 흑인은 버락 오바마가 유일하다. . 각료 중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 때 법무차관을 지낸 데벌 패트릭 현 매사추세츠 주지사와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현 국무장관 등이 두각을 나타냈을 뿐 민선 정치인 중에는 흑인이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흑인 주지사는 역대 4명뿐이었다. 이런 척박한 토양에서 흑인 정치인 오바마가 초선 상원의원에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 흑인 정치인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오바마는 흑백 갈등과 빈부, 보수ㆍ진보 등 사회의 모든 대립과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하겠다는 ‘미국의 꿈’을 전면에 내세우며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관련기사



김정곤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