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치는 필드에서 이뤄진다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의 중대 고비에는 어김없이 골프가 등장한다. 합당이나 주요 정책의 제휴에서 유력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에 이르기까지 늘 골프가 그 매개체로 활용돼 왔다. 1990년 1월 민정ㆍ민주ㆍ공화당의 3당 연합으로 탄생된 민자당의 출범 신호탄은 김영삼(YS)과 김종필(JP)의 골프회동에서 쏘아 올려졌다. 측근들과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라운딩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휘두르다 넘어져 멋적게 웃는 모습은 `3당 합당`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기도 했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이뤄진 DJP 연합도 시발점은 광주를 방문한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당시 국민회의 당직자들과 팀을 이뤄 골프를 하면서 비롯됐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한국신당과 무소속으로 남아 있던 김용환 강창희 의원의 영입을 골프장 회동으로 유도했다. DJ정권 내내 으르렁거렸던 JP와 이회창 전 총재도 정책 연합을 위해 그린 회동을 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청남대 반환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이 정대철 민주당 대표와 김종필 총재, 이원종 충북지사와 만찬 회동에 앞서 골프를 즐겼다. 이른바 밀실정치로 불리던 `요정정치`가 90년대 들어 불기 시작한 골프 대중화에 따라 `골프정치`로 자리를 옮긴 셈이다. 이쯤되면 골프는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스포츠가 아니다. 단순한 건강 유지나 친목 도모 차원이 아닌 정치의 한 행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정치골퍼 1위, 김종필 자민련 총재 골프 정치를 가장 애용하는 정치인은 현역에서는 김종필 총재가 맨 먼저 꼽힌다. 그에게 붙여지는 수많은 별칭 가운데 하나는 `만년 2인자`이지만, 뒤집어 보면 그는 늘 `2인자로서 킹메이커`였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모두 일정 부분 JP의 도움을 얻어 1인자가 될 수 있었다. `줄타기`에 `킹메이커`의 JP 정치행보에는 늘 골프가 끼어 있었다. 민자당 출범 전에는 YS를 필드로 끌어들여 거사를 성공시켰고, 이인제 의원을 자민련 총재에 앉히기 전에도 골프회동을 통해 분위기를 띄웠다. 또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당내 불만세력을 보듬을 때도 고정 카드로 골프를 활용했다. 정국이 급랭하는 심각한 국면 조성보다는 분위기 반전을 위한 현상 타개책으로 그린을 자주 찾는 JP다. “내가 건강을 잃으면 골프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책임진대?”라는 발언도 JP의 골프사랑에서 비롯됐다. 총재가 이렇게 골프를 즐겨하다 보니 엄숙한 국회 본회의장에서 골프 스윙요령에 관한 메모를 보는 자민련 의원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을 정도다. 정치인과 골프는 불가분의 관계다. 집권 이후부터 골프와 멀리 하고 있는 YS도 예전에는 “골프는 너무 재미있는 게 단점”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가 재임시 공무원들의 골프를 금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고 한다. DJ는 고령에다 몸이 불편해 골프를 직접 즐기지는 못한다. 그래서 야당 총재시절에는 “골프장을 갈아 엎어 논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97년 대선 당시 보수층 끌어안기 차원에서 골프 대중화를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반면 80타 중반 정도를 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골프를 너무 좋아해 충북도에 반환된 대통령 휴양지인 청남대에 6홀짜리 미니 골프장을 만들기도 했다. 골프 실력으로 따지면 민주당 박상규 한나라당 박종근 박희태 의원 등이 싱글에 버금가는 수준이고 자민련에는 이긍규 전 의원이 출중한 실력을 과시한다. 골프를 선호하는 것은 우리 정치인만은 아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도 재임 8년간 800라운드를 넘겼고, 장애인인 루스벨트 전 대통령도 장타자로 알려져 있다. 부시ㆍ클린턴 전 대통령들도 걸프전과 이라크 공습의 와중에도 회의만 끝나면 필드로 달려가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다양한 분위기에서 은밀한 대화가 가능 그렇다면 왜 굳이 골프여야만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YS가 민주화추진협의회 시절부터 즐겨하던 등산도 가능하고 호젓한 곳에서의 대화라면 낚시회동이 더 어울릴 것 같지 않은가. 또 체력단련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테니스나 탁구, 배드민턴, 축구 등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골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가지 패턴으로 유지되는 다른 레포츠 종목과는 다르다. 탁 트인 야외에서 4~5시간 걸어가면서 밀담을 나누고 끝난 뒤에는 목욕을 함께 한다. 라운딩 후에 자연스럽게 식사와 술을 곁들일 수도 있다. 치밀한 두뇌싸움을 벌여야 하는 정치인들로서는 협상이 벽에 부딪힐 경우 곧바로 이야기를 또 꺼내기가 힘들지만, 골프장에서는 분위기를 바꿔 슬며시 다시 화제에 올릴 수 있다. 운동과 목욕을 함께 하면서 자연스레 친밀감이 돋워지는 데다 운동 후에 이뤄지는 술자리까지 합석을 하면 흉ㆍ허물 없는 사이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다 운동 중에 `나이스 샷`이 터질 경우 딱딱했던 분위기가 일시에 부드럽게 반전되는 이점도 있다.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골프를 즐기는 동안 만큼은 무엇보다 도청이나 감청 당할 염려가 없다. 탁 트인 야외에서 4시간여를 함께 움직이면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으니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모두 `열린 자세`로 상대를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골프를 치지 않는다고 정치를 못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골프를 않고서는 자연스럽고 다양한 정치를 펴기에는 점점 힘든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정치인에게 골프는 이제 일부 계층의 전유물 같은 사치스런 운동이 아니라 정치적 생존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염영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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