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8월10일] 제이 쿡


남북전쟁 초기, 링컨이 위기에 빠졌다. 북군의 연패로 유럽 자금이 빠져나가 돈줄이 말랐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을 각오하고 불태환지폐 그린백을 발행해 다소 숨을 돌렸지만 전쟁은 끝없이 돈을 불렀다. 대안으로 연수익률 7.3%라는 좋은 조건에 국채를 발행했지만 팔리지 않았다. 국채를 사들일 기관투자가들의 호주머니도 비었던 탓이다. 파산 직전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외면당하던 국채가 팔리기 시작한 것. 은행가 제이 쿡(Jay Cooke)의 ‘마법’ 덕분이다. 쿡의 수단은 분할과 일반공모. 최소가 1,000달러짜리 국채를 50달러짜리로 쪼개 국민들에게 팔았다. 쿡이 고용한 통신판매원 2,500명은 국채 매입이 애국이자 횡재하는 지름길이라는 신문기사와 전단지를 갖고 보부상처럼 전국을 누볐다. 덕분에 채권투자 붐이 일고 5억달러어치의 국채가 모두 팔려나갔다. 전쟁 직전 인구의 1%에 불과했던 증권투자 인구도 5%까지 불어났다. 은행과 증권 브로커, 유럽 투자가들의 전유물이던 채권 투자가 대중화하는 첫 단추가 끼워진 셈이다. 전후에도 8억3,000만달러어치의 국채를 같은 방식으로 판매하는 데 성공, 최고 갑부로 떠오른 쿡의 출발점은 위조지폐를 가려내는 촉탁 행원. 1821년 8월10일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를 마치고 18세 때 은행에 들어가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철도회사 투기 실패로 1873년 대공황을 야기하며 파산한 뒤 광산투자로 재기, 1905년 83세로 사망할 때는 부자로 죽었다. 맨손으로 은행을 세우고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거짓을 일삼아 권모술수에 능한 투기꾼이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그는 채권 대중화를 통해 신생 미국이 방대한 자금수요를 스스로 충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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