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땅값 잡기

8ㆍ31 부동산종합대책 발표 이후 주택가격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토지가격은 행정중심복합도시ㆍ기업도시ㆍ혁신도시 등 대규모 개발사업이 예정된 지역이나 군사시설보호구역 해제지역 등 정부규제가 풀리는 지역을 중심으로 상승이 우려된다. 60년대부터 다양한 정책 시행 지난 6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연대를 거치면서 높은 땅값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땅값이 이처럼 올라간 것은 30년이 채 안되고 땅값 개념 자체가 우리 사회에 들어온 지는 100년이 안된다. 땅값은 토지가 사유지로서 시장에서 거래될 때 존재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말까지 모든 토지는 국유지였다. 세조 6년(1460년)에 제정된 전지가사매매한조(田地家舍賣買限條)에서 지계(地契)의 거래가 허락됐지만 이때 거래된 것은 토지에서 산출된 농산물 중 일부를 지대로 징수할 수 있는 권리였다. 본질적인 토지소유권은 국가에 있었다. 모든 토지는 국가에 속한다는 국유지 원칙은 고종 2년(1865년)에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 및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1876년의 이른바 병자년 강화조약과 1882년 조선ㆍ미국수호통상조약에서도 가옥의 임대 및 매매는 허락하지만 토지의 임대 및 매매는 허가되지 않았다. 국유지 원칙은 1883년의 조선ㆍ영국수호통상조약에서 비로소 허물어졌다. 이 조약으로 실질적인 혜택을 본 사람은 그 당시 조선으로 몰려들던 일본인이었다. 토지거래의 안정성을 보장해달라는 일본영사관의 요청으로 고종 30년(1893년) 한성부에서 가권(家券)을 발급했다. 근대적인 부동산등기가 시작된 셈이다.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인식된 것은 을사늑약 이후 제정된 1906년 10월의 조선부동산증명령과 1910년 3월의 조선민사령 및 조선부동산등기령이었다. 땅값의 개념이 드디어 나타났다. 이전에는 건물을 양도하면 토지는 대가 없이 저절로 이전됐다. 1914년 주택과 별도로 집터에 대해 시가지세(市街地稅)가 부과되면서 주택과 구분되는 토지만의 소유권과 토지가격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자 땅값이 확실히 인식됐다. 남북한 사유지 가액은 1918년 당시기준으로 8억8,000만원 정도였다. 남한만 추산하면 약 4억원, 평당 1.5전 수준이었다. 해방 무렵까지 땅값이 약 2배 올랐으니 45년 당시 가격으로 남한 땅값은 8억~10억원 정도였다. 해방 이후 땅값이 급등했다. 농지개혁이 시작된 50년 당시 기준으로 전국 땅값은 약 4,600억원으로 늘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토지는 62년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말 그대로 노다지가 됐다. 65년 전국의 땅값은 약 12조원이었다. 이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전국 땅값은 70년에 52조원, 80년에 412조원, 90년에 1,552조원, 2000년에 2,024조원, 2003년에 2,367조원으로 늘었다. 국민총생산 720조원의 3.3배 수준이니 국민 1인당 6,300만원의 자산을 갖고 있는 셈이다. 땅값 안정을 위해 60년대 중반부터 우리는 다양한 정책을 시행해왔다. 그러나 땅값은 상승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집값은 안정돼가는데 토지가격은 불안하다는 우려가 다시 일고 있는 지금 강력한 대책도 필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사회적 해답을 모아가는 것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규제보다 사회적 해법 필요 땅값은 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땅값 안정이 필요하더라도 규제정책을 통해 땅값이 안정된 경우는 거의 없다. 규제정책은 바람과 같고 분배정책 또는 재분배정책은 햇빛과 같다. 나그네의 겉옷을 벗겼던 것은 일시에 불었던 강한 바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비추던 따뜻한 햇볕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나라에서 겪었던 이 같은 경험들을 공유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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