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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75> 척화비


'척화비(斥和碑)'라고 이름 지은 것은 누구였을까. 원래는 외세에 부화뇌동하는 것을 경고한다는 의미였겠다. 어쩐지 평화에 대한 거부의 뜻으로도 읽힌다. 이를 세우게 한 흥선대원군에게 고집불통 이미지를 씌웠다. 유럽 제국들이 식민지를 넓힐 때 쓰는 통상적인 수법은 선교사를 먼저 보내고 다음에 군대와 상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선교사 탄압과 통상 거부를 이유로 프랑스와 미국이 잇따라 조선을 침략한다. 지난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가 그것이다. 외적을 물리친 조선은 전국 각지에 바로 이 척화비를 세운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으로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로 해석된다. 사진의 척화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원래 1871년 서울 종로의 보신각 앞에 세워진 것이다. '척화'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비문의 예언은 섬뜩할 정도다. 34년 후인 1905년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5적'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굴복하면서 양이의 하수인인 일본에의 '매국(賣國)'은 현실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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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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