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CEO/팝코전주 선우영석사장] "적자기업 존재가치없다"

그의 말은 막힘이 없다. 가벼운 농담도 잘하고 경영에 관한 이야기를 할라 치면 더욱 능숙하다. 많은 지식을 머리에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풀어내는 실력도 수준급이다.선우영석(鮮于永奭) 팝코전주 사장. 부러운 사람이다. 사회생활 시작부터 거침없이 달려온 인생이었고 지금은 매출 6,000억원에 순이익만 2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다국적기업의 최고경영자(CEO)다. 팝코전주는 한솔제지·캐나다 아비티비 콘솔리데이티드·노르웨이 노스케 스콕 3사가 합작으로 설립한 팝코(PAPCO)의 한국법인이다. 팝코는 아시아 최대의 신문용지 업체로 자본금은 6억달러 부채비율은 100% 내외. 전체 생산규모는 연간 150만톤에 달한다. 팝코는 한솔제지로부터 9억7,000만달러에 사들인 전주공장을 팝코전주로, 한국노스케스콕(舊 신호제지 청원공장)은 팝코청원으로 바꾸었다. 이 두개 한국법인은 올해안에 팝코코리아로 통합될 예정이며 鮮于사장은 통합법인의 대표이사로 가장 유력하다. 이미 팝코청원 사장 취임을 앞두고 있어 그 수순을 밟아가고 있는 셈이다. 팝코전주는 연간 100만톤의 신문용지 생산능력을 갖고 있다. 단일공장으로 세계 3위를 자랑한다. 고지(古紙)를 사용해 신문용지를 만드는 고지재생기술이 뛰어나 원가경쟁력도 높다. 185㎝의 키, 유창한 영어실력, 국제적인 경영감각, 그리고 추진력과 꼼꼼함. 그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1944년 3월생. 鮮于사장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경복고등학교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다녔다. 그가 처음 사회에서 발을 디딘 곳은 삼성그룹 계열의 제일모직이다. 이때가 1970년. 그 다음은 삼성물산이었다. 75년 국내 종합상사 1호로 탄생한 삼성물산에서 그는 제일모직에서 만든 직물을 수출했다. 당시 1억달러 수출액 가운데 2,500만달러가 과장이었던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캐나다 몬트리올·미국 뉴욕지사 근무(77~83년)도 했다. 군시절에도 영자지(英字紙)를 손에서 놓지 않았을 만큼 영어를 좋아했고 잘했던 鮮于사장이었다.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외국으로 나간 것도 국제적인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鮮于사장이 그때 보여준 일에 대한 열정은 가족들의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鮮于사장은 『지금이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만 그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며 『그렇게 간 미국에서 제대로된 구경한번 못시켜줬다고 지금도 구박을 받는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는 낯선 이국땅을 자신의 시장으로 만드는 동안 추진력을 체득했다. 83년 한국으로 다시 들어온 그는 삼성중공업으로 자리를 옮겨 해외사업부(이사), 지게차(상무), 항공기사업부(부본부장)를 두루 거쳤다. 鮮于사장에게 맡겨진 가장 크고 중요했던 임무는 차세대전투기(KFP) 사업이었다. 단군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이라고 했던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는 지금도 『10년 이상을 끌었던 KFP사업을 맡아 기종을 선정하고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공장을 짓고 나왔던 그 시절이 가장 보람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삼성중공업과 삼성항공은 鮮于사장에게 경영자가 반드시 지켜야할 「제1원칙」을 일깨워줬다. 「흑자경영」에 대한 철학이었다. 『적자나는 기업에 10여년을 있다보니 회사는 무조건 흑자가 나야 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흑자를 내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의의가 없다는 것이 변치 않는 신념』이라고 그때를 회상하며 거듭 강조한다. 한솔로 자리를 옮긴 해는 93년. 첫자리는 한솔무역 대표이사 전무였다. 부모(삼성)로부터 독립해 나왔지만 아직은 국경을 넘나드는데 서툴렀던 한솔에 세계시장이 어떤 것인지, 수출이 왜 중요한지를 설득하는 전도사 역할이었다. 96년에는 한솔그룹 세계화추진사업단 부단장을 맡기도 했다. 한솔무역은 鮮于永奭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기회를 줬다. 한솔무역은 백판지(산업용 포장재)를 생산하는 한솔판지와 합병하면서 ㈜한솔로 이름을 바꾸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한솔판지가 법정관리 상태였기 때문이다. 『판지를 제지에 합병했어야 했지만 둘다 상장회사다 보니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솔무역이 합병됐는데 적색업체로 분류돼 있는 무역회사는 도대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가자 마자 4개월 이내에 법정관리를 졸업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담당판사를 찾아가 설득을 거듭한 끝에 거짓말처럼 4개월 되던날 법정관리 해제결정을 받았다』 대전지법 임기 마지막날 승인을 내려준 그 판사는 『당신처럼 지독한 사람은 처음』이라는 말로 해제승인 이유를 대신했다고 한다. 鮮于사장은 팝코전주에서 또다른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스스로 충분히 국제화됐다고 생각했었지만 아직도 「문화충격」을 느낀다고 한다. 『팝코는 3국이 합작한 기업이다. 우리 방식대로만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면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렇지만 문화적차이를 없애기 위해 대화를 하다보면 이해의 폭이 넓어져 오히려 상대를 더 존중하게 된다.』 팝코전주로 발령을 받았을때 본가(한솔)와 멀어진다는 생각에 섭섭했다는 鮮于사장. 출범 6개월만에 목표치를 넘는 성적을 냈다. 『합작기업을 맡아 새로운 의욕이 솟구칩니다. 팝코전주 탄생자체가 한국기업의 성공적인 구조조정의 결과인 만큼 팝코전주를 반드시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강한의지가 배어있었다. <약력> ▲44년 서울생 ▲62년 경복고 졸 ▲70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 ▲70년 삼성그룹 제일모직 입사 ▲77년 삼성물산 캐나다 몬트리올 지점장 ▲70년 삼성물산 미국 뉴욕지사 근무 ▲84년 삼성중공업 해외사업부 이사 ▲88년 삼성중공업 지게차 총괄 상무 ▲89년 삼성항공 항공기사업본부 부본부장 ▲91년 삼성항공 KFP 사업본부장 전무 ▲94년 한솔무역 대표이사 부사장 ▲96년 한솔그룹 세계화추진사업단 부단장 겸임 ▲97년 ㈜한솔 대표이사 사장 ▲98년 한솔제지 신문용지사업부문 사장 겸임 ▲98년 팝코전주 대표이사 사장 박형준기자HJPAR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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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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