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3월 25일] 선진국의 조건

100년을 끌어온 미국의 건강보험 개혁 논의가 마침내 사실상의 최종 표결에 부쳐진다고 했을 때 '설마 되겠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건강보험 개혁안의 실효성과 재정부담을 둘러싼 민주당과 공화당 간 논의가 그만큼 치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보개혁안은 별 탈 없이 통과됐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설마'한 생각은 한국 정치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탓 같았다. 미국의 건보개혁에 버금가는 중대 이슈가 있을 경우 한국에서는 미국 같은 결말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온 정치인들이 죽기살기로 싸우다 밑도 끝도 없는 이념 문제로 비화하거나 해외 언론들조차 이제는 심드렁해졌을 듯한 집단 몸싸움 장면을 연출하기 일쑤다. 우리나라의 경우 애초에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토론보다도 힘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려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미국 정치인들은 자신과 아무리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도 합리적 절차를 거쳐 정정당당하게 승부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고성이나 주먹이 오가지 않는다. 결국 미국ㆍ한국 정계의 차이는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라는 이야기다. 이는 물론 정치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화제가 됐듯, 한국인의 3분의1가량은 구급차에 정말 급한 용무가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길을 터주지 않는다. 하다못해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면서도 혼자 에티켓을 지켜봤자 손해라는 생각 때문에 더더욱 조바심을 치게 된다. 이 같은 신뢰 부족에 따른 한국사회의 시간낭비와 돈 낭비가 구체적으로 집계된 적은 없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말다툼에 성폭력 방지법안이 계류되면서 생긴 인명피해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사회적 신뢰도가 10% 상승할 때 경제 성장률도 0.8%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 세계은행의 조사를 봤을 때 저(低)신뢰에 따른 경제적 손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몇몇 대기업이나 운동선수들의 성과만 갖고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마냥 자화자찬할 게 아니다. 어차피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들여다보면 금방 탄로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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