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29일] <1460>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7월29일, 도쿄. 이틀째 회의를 진행해온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와 윌리엄 태프트 미국 전쟁장관이 밀약을 맺었다. 세 가지 합의사항 중 한반도 관련 합의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점.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작가인 로버트 올리버에 따르면 밀약은 ‘조선의 사망증명서에 날인’하는 행위였다. 조선은 밀약을 전혀 몰랐다. 내용이 공개된 게 1924년이었으니까. 밀약이 체결되는 순간에도 고종은 미국을 철석같이 믿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 1조에 명시된 '불공경모(不公輕侮)', 즉 ‘제3국으로부터 부당하게 업신여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뜻의 문구를 외세침략을 막아줄 바람막이로 여기고 미국에 매달렸다. 미국은 왜 밀약을 맺었을까. 러시아 견제와 중국시장 진출을 위한 일본의 협조를 원했던데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특유의 친일적 선입견이 작용한 탓이다. 루스벨트는 극동으로 떠나는 태프트에게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조항이 포함된 조약을 전적으로 환영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태프트의 밀약체결 보고서를 읽은 뒤에는 ‘모든 사항을 추인한다고 일본에 전하라’는 회신까지 해 밀약을 미국 대통령의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응원군을 얻은 일본은 밀약체결 이후 100여일이 지나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미국은 늑약체결 후 가장 먼저 외교공관을 철수시켰다. 밀약의 당사자들이 미국의 27대 대통령, 일본 총리(가쓰라 2기 내각)으로 재임하던 1910년 조선은 결국 일본에 병탄됐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104주년,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한국이 배제된 채 미국과 중국ㆍ일본의 3국 협의체가 결성을 앞두고 있다. 남들 손에 우리 운명을 결정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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