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피터 린치/김유상 투자신탁협 회장(로터리)

피터 린치(Peter Lynch). 투자신탁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동경했던 인물이다. 미국의 세계적인 투자신탁 회사인 피델리티사에서 운용하는 마젤란 펀드를 만들었고 지난 77년 운용의 책임을 맡은 이래 역사상 최대의 뮤추얼 펀드로 성장시킨,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대표적인 펀드매니저다. 현역시절 피터 린치는 마젤란 펀드의 운용으로 운용회사인 피델리티에 연간 수천만달러의 운용수수료와 수억달러의 판매수수료 수입을 가져다 주었고 린치 또한 펀드에 대한 성과 보너스로 연간 수백만 내지 수천만달러를 받았다.이러한 투자의 천재는 보스턴 대학의 한 수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린치의 아버지는 암에 걸려서 린치가 10세되던 해 가족에게 가난만 남겨놓은 채 죽고 말았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고등학교 때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골프장 캐디로 일했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증권시장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업가들은 골프를 하면서 투자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린치는 증권투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업가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플라잉 타이거 라인 주식에 투자하였다. 당시 플라잉 타이거 라인은 태평양 연안국들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힘입어 지속적인 성장을 구가, 주가는 계속 상승하였다. 이후 보유주식의 일부를 처분하여 투자원금을 회수하고 주가가 오를 때마다 또한 조금씩 회수했는데 그가 최초 투자를 대부분 회수했을 때의 금액은 펜실베이니아 경영대학원에서 재무관리를 공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린치는 대학에 입학한 후 골프가 가져다준 두번째 행운과 만나게 된다. 보스턴대학은 캐디를 위해 3백달러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후 골프의 여신은 그를 또 도왔다. 66년 무렵 피델리티에서 여름철 임시직을 얻게 되었다. 그가 이 회사 사장인 조지 설리반의 캐디로 일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75명의 지원자 중에서 선발되었다. 69년 군복부를 마친 후 피델리티에 금속업종의 분석가로 정식채용되어 몇년 동안 분석업무를 한 뒤 74년 조사담당이사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화학, 철강, 섬유분야 등의 조사에 관한 일을 계속했다. 이런 일은 주식에 대해 깊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 셈이 되었다. 77년 33세가 되던 해 린치는 피델리티의 조그마한 펀드인 마젤란펀드를 맡게 되었다. 린치의 성공은 행운에서만 기인된 것은 아니다. 선천적인 재능 외에도 린치가 많은 경쟁자보다 기본적으로 우수한 점은 일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에 있다. 그는 남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었다. 린치의 가장 확실한 투자정보는 기업방문으로부터 얻어졌던 것이다. 투자신탁시장 대외개방이 목전에 다가왔다. 오는 12월이면 마젤란펀드, 퀀텀펀드, 타이거펀드, 소로스 캐피털펀드 등과 같은 세계 유수의 외국투자신탁상품이 투신사나 증권사 창구에서 국내 투신사 상품과 같이 투자자의 선택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개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펀드들과의 무한경쟁시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국내 투신사의 펀드매니저와 린치와 같은 외국의 펀드매니저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현재 국내 투신사 펀드매니저의 현실을 보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일부사에서 인센티브성 성과급제도를 도입하는 등 펀드매니저에 대한 우대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투신시장 개방과 함께 펀드매니저 실명제도입, 운용실적에 따른 철저한 성과보수 지급, 운영에 대한 완전한 자율성 부여 등으로 앞으로 세계 유수의 펀드매니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우리의 「피터 린치」가 탄생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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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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