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골프 골프일반

[Culture & Life] LPGA투어 상금퀸 박인비

US오픈 우승 후 슬럼프… 바닥부터 다시 시작, 행복한 골퍼 됐죠


지난 7월 에비앙 마스터스 우승으로 태극기를 휘날린 박인비는 10월 사임다비 말레이시아 대회에서 미국 LPGA 투어 시즌 2승째를 거뒀고 평균타수 1위에 올라 베어 트로피까지 거머쥐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할아버지·아버지 강권에 초등 4년때 골프 시작
필드선 조용한 암살자… 밖에선 스물넷 꽃처녀

2009년엔 대회장 가는 것조차 싫어 은퇴도 생각
코치 겸매니저 역할 약혼자 배려로 거듭 태어나


美·日서 70억 벌어… 꿈나무 육성 등에 기부도
청야니 넘고 내년 선수상·세계 1위 등극이 목표


한국 여자프로골프가 세계 최강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지만 올해는 더욱 특별한 한 해였다. 지난해 청야니(대만)라는 '괴물'에 밀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3승을 합작하는 데 그쳤던 한국(계) 선수들은 올해 그 3배인 9승을 쓸어담았다. 최나연이 US여자오픈 우승으로 개인 첫 메이저 타이틀을 따냈고 신지애도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 등 2승을 올리며 부활했다. 최나연∙신지애는 골프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들의 이름은 알 정도의 '투톱'. 올해는 여기에 박인비(24∙사진)가 가세해 '트로이카'를 이뤘다. 박인비는 228만달러(약 24억7,000만원)를 벌어들여 상금퀸에 올랐고 평균 70.21타로 최저타수상인 베어트로피까지 거머쥐었다. 지난 2007년 데뷔 후 최고의 한 해를 보낸 것. 2일 끝난 한일 대항전에서는 최우수선수(MVP)까지 차지했다.

한국은 물론 세계 여자골프를 대표하는 여왕으로 발돋움한 박인비를 강남의 한 뷰티숍에서 만났다. 행사 참석을 앞두고 '꽃단장'을 한 박인비에게서 '조용한 암살자(silent assassin)'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올 시즌 우승 두 차례와 준우승 6차례를 하는 동안 그 흔한 세리머니조차 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유지해온 박인비를 미국 언론은 그렇게 불렀다. "별명이 생겼다는 것 자체로 감사한 일이죠. 근데 저 평소에는 이렇게 잘 웃는 걸요." 카메라 렌즈를 보고 입가를 올리는 박인비는 필드 밖에서는 영락없는 스물넷 '꽃처녀'였다.

◇불행한 골퍼에서 행복한 골퍼로=박인비가 세계 골프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2008년. 그해 미네소타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4타차로 덜컥 우승을 해버렸다. 2년차였던 그의 나이는 불과 만19세11개월17일. US여자오픈 최연소 우승기록이었다. 박인비는 "그때는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세계 최고가 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고 돌아봤다. 이후 3년간 미국에서 우승이 없었다. 2009년 공동 5위, 2010년 2위, 지난해에는 공동 6위가 최고였다. 그중에서도 2009년이 가장 괴로웠다고 한다. "대회장에 가려고 짐을 싸는 것조차 싫었어요. 골프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까 하는 생각을 매 순간 했던 것 같아요." 슬럼프였다. 세계 최고도 어렵지 않다는 패기로 덤벼든 것은 좋았지만 두 번째 우승이 빨리 나오지 않자 괜히 조급해졌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골프가 더 안 되는 악순환을 겪었다. 이 과정을 거친 뒤 박인비는 자연스럽게 우승 전으로 돌아갔다. "나보다 잘 치는 선수가 너무 많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된 거죠. 2010년과 지난해는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편했어요."


박인비는 지금의 자신을 '행복한 골퍼' '복 받은 골퍼'라고 했다. "지난 5년 동안은 행복하지 못했어요. 반복되는 생활과 외로움에 '과연 이게 맞는 길인가' 하는 고민도 많았죠. 하지만 올해부터는 대회장 주변의 맛있는 곳, 재미난 곳도 찾아 다니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성적도 중요하지만 골프 치는 것도 행복하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박인비의 이런 변화는 약혼자인 남기협(31)씨의 영향도 컸다.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프로 출신인 남씨는 올 시즌 박인비가 출전한 대회들을 빠짐없이 함께하며 코치 겸 매니저 구실을 했다. 박인비는 훤칠한 '훈남' 외모의 남씨에 대해 "못 치고 들어올 때 오빠(남씨)의 표정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다 보인다. 같은 프로 출신이라서 안 좋은 점은 아직까지 없다"고 했다. 4년 정도를 사귄 박인비와 남씨는 지난해 약혼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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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까지 3대가 동반 라운드=박인비는 골프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골프광이다. 2대는 함께 필드를 나갈 때마다 '3대 동반 라운드'를 그렇게 소원했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해 수의사를 꿈꾸던 박인비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초등학교 4학년 때 골프채를 잡았다. 이후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중학교는 플로리다에서, 고등학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나왔다. 세계적 교습가인 데이비드 레드베터(플로리다 소재 아카데미)한테서도 배우게 하고 부치 하먼(네바다주 소재 아카데미)의 가르침도 심어주려는 아버지의 계획 때문이었다. 박인비는 올 8월 분당 남서울CC에서 할아버지∙아버지와 동반 라운드를 했다. 십수년 전 2대의 바람대로 3대 동반 라운드가 연례행사가 됐다. 박인비의 아버지는 싱글 수준의 아마추어 고수.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는 박인비가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골프를 치신 분"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구력이 어마어마하다.

박인비가 미국에서 6년 동안 벌어들인 상금은 526만달러(약 56억8,000만원). 일본 투어를 겸하며 쌓은 상금과 각종 부수입을 더하면 총 수입은 7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절반가량은 사업에 투입됐다. 3년 전 어머니와 함께 음료수용기 제작회사를 차린 것. "지금은 작은아버지와 동업하고 있는데 영업할 때 제 사인이 들어간 볼과 모자를 이용하면 그렇게 잘 통한다고 하네요." 박인비는 기부에도 열성이다. '사랑의 버디' 기금으로 난치병 어린이들을 돕고 있고 국내 한 초등학교에 골프연습장을 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박인비는 "나보다 적극적으로 좋은 일에 나서는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이 부각돼야 한다"며 "유망주 육성과 난치병 어린이 돕기는 꾸준히 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넘어야 할 산은 그래도 청야니=18홀 평균 퍼트 수 28.34개로 1위, 언더파 스코어를 적어낸 라운드 수 57개로 2위, 톱10 피니시율 50%로 3위, 총 버디 수 347개로 3위. 올 시즌 박인비가 보여준 완벽에 가까운 골프는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내년 시즌 독주를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인비는 "아직 청야니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다. "후반에 주춤하기는 했지만 잠재력이 엄청난 선수예요. 장타력과 그린 주변에서의 리커버리 능력은 여전히 배워야 할 점이고요. 남들 7번 아이언 잡을 때 피칭웨지를 드는가 하면 2온이 어려운 파5홀에서 쉽게 두 번에 올려버리니 이런 건 큰 차이죠." 올해 청야니와 네 차례 정도 같은 조에서 붙었던 박인비는 "결과는 내가 조금 더 좋았던 것 같은데 청야니가 흔들렸던 후반기에 만난 것이어서 큰 의미는 없다"고 했다. 세계랭킹 1위 청야니는 시즌 초반 3승을 올렸지만 이후 11개 대회 연속으로 톱10 밖으로 밀리며 심각한 슬럼프를 겪었다. 은퇴설까지 나돌았지만 막판 들어 제법 살아난 모습을 보이면서 '여제' 타이틀을 놓고 펼칠 박인비와의 경쟁이 2013시즌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내년의 목표는 올해 아깝게 놓친 올해의 선수상 수상과 세계 1위(현재 4위) 등극이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한때 먹었던 '빨리 은퇴하고 싶다'는 마음을 올해를 계기로 떨쳤다는 거예요. 성적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올해처럼 행복하게 오래오래 선수생활하면서 후배들에게 모범적인 선수로 남고 싶습니다. 물론 먼 훗날 명예의 전당에 입회하게 된다면 여한 없이 눈을 감을 수 있겠죠?"

양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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