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씨에 농락당한 청문회(사설)

국회 한보국정조사특위는 7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을 상대로 첫 청문회를 개최함으로써 25일간의 「청문회 장정」에 들어갔다. 이날 청문회는 한보비리가 건국 이래 최대 의혹사건이라는 점에서, 또 검찰수사가 은폐 축소라는 국민들의 의구심을 불러 일으켜 재수사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온 국민은 일손을 놓은 채 TV 생중계 광경을 지켜보았다.그러나 이날 청문회는 한마디로 정태수씨의 「원 맨 쇼」무대였다. 그는 『모른다』 『없다』 『재판에 계류중이기 때문에 답변할 수 없다』는 등의 방자한 자세로 일관, 그 어느 의혹 하나 시원스럽게 밝히지 않았다. 정씨는 그러면서도 질문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전개될 것 같은 조짐만 보이면 곧바로 변명성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한보비리가 우리나라 경제를 강타하고, 불도덕·반사회적 기업인으로서 전국민을 실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으며,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적인 신인도마저 떨어뜨린데 대해 한마디 죄송하단 말도 없이 오히려 자신의 무실함만을 주장, 4천5백만 국민을 우롱했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로 사실 이번 한보비리 청문회는 애시 당초부터 「우려」가 「기대」보다 컸었다. 그것은 정씨가 곧 한보비리의 실체요, 김현철씨 의혹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 의원들 자신이 한보의혹으로부터 별로 자유스럽지 않은 상황에서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기대보다 「소문만 요란한, 먹을 것 없는 잔치」로 끝날 것 같다는 우려도 높았다. 청문회는 국회의 국정조사활동 가운데 증인을 직접 불러 조사하는 국회의 중요한 「국정행위」다. 검찰의 조사가 미진하다는 전제하에 국회차원에서 열리는 청문회는 미의회의 「청문회제도」를 도입,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88년 5공청산 당시 처음으로 열려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 속에 TV로 생중계돼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청문회 결과는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흐지부지됐다. 결국 새정부 들어 5공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재개되고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의원보다 정씨 더 당당 한보비리의 첫날 청문회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선 청문회에 임하는 일부 의원들의 자질문제다. 청문회는 관련 자료의 수사나 금융거래조사 등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수사방식이 아니고 신문하는 증인의 진술내용에 의지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특위위원들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 아니고서는 증인으로부터 속시원한 답변을 기대하기 어렵다. ○진실은 더 꽁꽁 숨겨져 지난 주까지 진행된 특위의 14개기관에 대한 조사결과만 봐도 뚜렷한 진실파악 작업이 이뤄지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의원보좌관이나 전문위원들의 적극적인 조사활동이 필수적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이번 한보청문회를 일종의 「코미디」성으로 만든 것이다. 또 특위위원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정당을 지나치게 의식, 자당을 위한 해명성 발언으로 특위위원들간에 볼썽사나운 자중지란을 연출한 것도 청문회의 본뜻을 흐리게 했다. 둘째는 청문회에 나선 정태수씨의 자세다. 그는 지금 한보비리의 주범으로 형사재판에 계류되어 있는 피고인이지만 청문회에서는 「증인」으로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형사법상의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국회를 모독하거나 위증할 경우 고발되어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정씨는 특위위원들의 질문에 대해서 시종 도발적인 자세로 일관, 심지어 『만번 물어도 모른다고 하면 모른다』고 입을 다물어 「자물통」의 위세를 과시하는 듯 했다. 정씨의 이같은 자세는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도발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또 그의 오만 방자한 모습에서는 청문회에 나오기 전 「입맞추기」를 했으며 그를 비호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의혹을 짙게 한다. 『혹시나…』하면서 청문회를 지켜본 시민들도 한결같이 분노했다. 『도대체 뭘 믿고 그러나』하고. 앞으로 남은 청문회는 첫날의 청문회를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된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경우 5공때와 마찬가지로 다음 정권에서 청문회를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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