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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했던 가난… 장사 일찍 눈떠
부담없이 멋내고픈 여성심리 파악
뒷골목 리어카 명동 진출로 '날개'
업종 바꾸려다 8,000만원 날려
박리다매로 다시 명동 휘어잡아
프랜차이즈 만들고 '정직 경영'
매년 수십개 매장 늘어 120개로
이젠 '액세서리 한류' 도전할 것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부모님은 거리에서 배추를 팔며 하루 벌어 늙은 조모와 7남매를 먹여 살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12년 내내 도시락 반찬은 단무지였다. 김치라도 곁들이는 날에는 횡재였다. 자연스럽게 돈을 버는 것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초등학교 때 신문배달을 시작으로 이삿짐 나르기와 아파트를 전전하며 휴지 팔기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야간대를 택해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했다. 학교에서 받은 근로장학금으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조달했다. 성인이 되면 좀 다른 세상이 열릴 줄 알았지만 삶은 여전히 칠흑 같았다. 군대에서 제대한 지난 1991년 가을, 남가좌동 모래내시장 뒷골목에서 리어카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종잣돈 34만원을 털어 산 1,000원짜리 액세서리들과의 만남. 그것이 그의 인생을 완벽하게 바꿔줄 것이라는 사실은 하늘만 알고 있었다.
서울 중구 회현동 사옥에서 만난 양진호(45·사진) '못된 고양이' 대표는 리어카에서 시작해 지금은 120개 매장을 가진 중소기업 수장인 프랜차이즈 업계의 신화적 인물이다. 외식업이 주류를 이룬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액세서리라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그는 소시민들에게 꿈과 끈기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우리 시대의 영웅인 셈이다.
못된 고양이는 못됐지만 못되지 않은 까칠하고 도도한 여자를 뜻한다. 2008년 당시 '까도녀' 개념이 없을 때 양 대표는 '못된'이라는 중의적 의미의 단어를 도도한 동물 고양이와 결합해 브랜드명을 만들고 2011년 주식회사 못된 고양이를 세웠다. 1호점 명동점을 시작으로 매장이 생길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화제를 몰고 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1,000원짜리 액세서리를 파는 믿을 만한 프랜차이즈 전문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폐업률이 낮고 수익률이 높다는 소문까지 확산되며 프랜차이즈로서는 특이한 아이템임에도 1년에 수십 개씩 매장이 늘어났다.
양 대표는 "보통 최고경영자(CEO)는 유통·생산 출신이 많아 매장 경영에 대한 이해도가 낮지만 나는 매장 출신이어서 가맹점주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면서 "못된 고양이는 시류에 민감하지 않고 한번에 대박은 없지만 미래의 계획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이 이점"이라고 설명했다.
남자인 그가 액세서리를 택한 이유는 뭘까. "세상이 어려워도 여성들의 액세서리에 대한 욕구는 줄지 않는다는 데 있죠. 특히 못된 고양이 제품은 저렴합니다. 경기가 좋지 않아도 여성들은 액세서리로 스트레스를 풀려는 경향이 있어요. 노소를 불문하고 10대부터 50대까지 여성들은 모두 유행을 따르려고 해 저렴한 액세서리에는 저항감 없이 지갑을 엽니다." 양 대표는 그러면서 "대중요금은 다 올라도 못된 고양이 액세서리 가격은 안 올랐다"며 "못된 고양이가 메인 상권에서 팔면서도 가격을 올리지 않은 덕분에 평균 가격이 저렴하게 형성되고 있다"고 힘줘 말했다.
실제로 가격은 고민거리가 못 된다. 못된 고양이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직한 경영'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적용된 국가기술표준원의 접촉성 금속 장신구 안전·품질표시 기준 가이드라인을 지키는 곳은 남대문시장에서 못된 고양이가 유일해서다. 경쟁사들이 짝퉁을 섞어 팔지만 못된 고양이는 품질 규정을 준수하고 정품(라이선스 제품)만 고집한다. 정부가 만들어놓은 규제를 독야청청 어렵게 지키고 있지만 정작 정부가 단속은 외면해 그의 가슴만 타들어간다. 3만 가지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다 보니 그동안 무납·무니켈 등 인체에 유해한 중금속성 규제를 지키지 않은 협력사와 일하기기는 쉽지 않았다. LA 액세서리쇼 등을 통해 대량의 오더를 받았지만 해외의 까다로운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해 수출할 수 있는 제품이 많지 않다. 양 대표는 "국내 액세서리들이 금속성 물질 규제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못된 고양이만을 위한 정품을 만들어줄 수 있는 협력사가 거의 없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런 고충은 조족지혈이다. 양 대표에게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처절한 고난의 시절이 있었다. 1992년부터 4년간 리어카 액세서리 장사로 8,000만원을 모았지만 액세서리가 신물 나 신발 판매를 시도했다. 피 같은 7,000만원을 삽시간에 날렸다. 성공해 나타나겠다며 5년간 가족·친구와 의절한 채 화장실 없는 800만원짜리 전세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시간이 억울해 몇 날 며칠 술값으로 1,000만원을 날렸다. 그러다 외환위기(IMF)가 터졌고 어려워진 매형의 사업을 도우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양 대표는 현재 스포츠 브랜드 올포유와 캘러웨이골프의 '한성에프아이' 대표인 매형 김영철씨가 판매하던 재고의류 10만장을 모두 팔아 치우며 타고난 장사수완을 발휘했다. 1년째 되던 날 600만원을 들고 나와 다시 액세서리 사업을 시작했다. 몇 년간 모은 자금으로 종로에 매장을 열고 마진폭을 경쟁사보다 절반으로 줄이며 대신 많이 파는 전략으로 주변 액세서리 매장을 초토화했다. 2003년에는 액세서리의 메카인 명동으로 진출했다. 명동에서도 남들이 2,000원에 파는 것을 1,000원에 내놓았다. 명동이 또다시 쑥대밭이 됐다. "명동에서 1,000원짜리 액세서리를 등장시킨 게 바로 접니다. 모두 따라서 1,000원에 팔기 시작했죠. 가격을 이기는 것은 없거든요. 제가 또 연계판매의 달인이에요. 팔찌를 하나 사면 귀걸이·반지까지 풀라인으로 구입하는 바람에 한 사람이 저가 액세서리를 4만~5만원어치씩 사갔죠." 이 같은 자신감으로 못된 고양이 브랜드가 태어났다.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지만 양 대표는 못된 고양이와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300여곳의 협력사들과 1주일 단위 현금결제 약속을 8년째 지켜오고 있다. 대기업도 안 하는 페어플레이 정책은 중소기업에서는 더욱 보기 드문 모습이다. 물건을 받아오면 그 주에 바로 결제하기 때문에 더욱 유리한 조건에서 제품을 받고 협력사는 자금 걱정에서 자유롭다.
못된 고양이가 태어나면서 자신과 한 또 하나의 약속은 어려운 아이를 후원하기 통해 '인생의 부가세'를 내기로 한 것. 1명이던 아이는 벌써 50명까지 늘었고 목표까지 절반 남았다. 한 후원단체에는 매달 100만원씩 기부금을 내고 있다.
이제는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기보다 더 넓은 곳으로 나가 한류 액세서리 돌풍을 일으켜보는 게 새로운 꿈이다. 세븐일레븐 같은 편의점처럼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못된 고양이를 만날 수 있는 '액세서리 편의점'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다. "제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더 큰 곳, 더 좋은 곳, 더 넓은 세상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가좌동 뒷골목에서 종로로, 더 넓은 명동으로 진출해 살아남았던 것이죠. 못된 고양이는 더 큰물인 세계 시장으로 나갈 겁니다." 양 대표는 다채로우면서 한 가지 색깔에 머물지 않는 무지개 같은 인물이었다.
He is… |
휴대폰 케이스·파우치·손난로까지… 가격· 품질·디자인 갖춰 대박 행진 패션 액세서리 브랜드 '못된 고양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