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다시 온 명퇴의 계절] 짙어지는 위기에 구조조정 수위 높여… 금융권 3000명 넘을 듯

금융지주 비상경영체제 돌입이어 보험·카드사도 10% 정리 계획<br>"조건 좋아 새 인생 기회" 의견 속 "직업 선택 폭 넓지 않다" 반론도

4일 서울시내를 걷는 어느 금융사 직원들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금융권에서는 최근 일부 은행 등을 중심으로 명예퇴직 시즌이 다가오면서 중견 이상 임직원들이 숨죽이고 있다. 서울경제DB



명예퇴직은 금융계에서는 상시로 이용하는 '군살빼기' 제도다. 인력을 줄여야겠는데 무턱대고 해고할 수는 없으니 직원에게 특별퇴직금을 지급하는 형식이다. 금융계의 인력구조가 연령을 기준으로 볼 때 20대와 50대의 비중이 낮은 '항아리형'인 만큼 이를 상시 구조조정을 통해 조절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위원회가 지난해 10월 은행과 증권회사, 생ㆍ손보사, 자산운용사, 선물회사, 상호저축은행, 여신금융전문회사, 신용협동조합 등 7개 주요 업종을 대상으로 인력구조를 조사한 결과 연령별 인력비중은 30대(40.5%), 40대(30.6%), 20대(20.2%) 순이었고 50대 이상은 8.7%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감도는 명예퇴직의 분위기는 과거와 사뭇 달라보인다. 실물경기 불황에 이은 금융회사들의 실적악화가 인적 구조조정으로 연결되고 명예퇴직이 불가피한 수단으로 작동하면서 '스산한 바람'이 금융가에 감돌고 있다.


◇갈수록 짙어지는 명예퇴직의 그림자=시중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실적악화를 이유로 명예퇴직을 단행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등 최악의 상황에서만 단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상황이 지속될 경우 상황이 달라진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도 "우려되는 게 바로 그 지점"이라면서 "솔직히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면 얘기는 달라지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금융지주회사는 일제히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해 그 강도를 높이고 있다. 농협금융지주는 7개 계열사 경영진의 임금을 8월부터 12월까지 10% 삭감하기로 했고 은행권은 급여를 줄이되 휴가를 늘리는 방안을 찾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를 '최악의 해'로 규정한 카드ㆍ보험사는 인력을 10% 감원하는 계획을 검토할 정도다.


더구나 내년에 대한 전망은 더 어둡다. 내수가 위축된 상황에서 세계경제의 동반침체 장기화로 마땅한 돌파구를 찾기도 어렵다. 금융지주의 한 고위관계자는 "미국ㆍ유럽에 이어 이제는 중국ㆍ신흥경제국도 어려워지고 있고 우리나라의 수출은 모든 나라에서 빠른 속도로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위기의 징후가 너무 빠르게 짙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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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퇴직, 지난해 수준 넘어설까=금융계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략 3,000명 이상의 명예퇴직을 실시했다. 조건도 나쁘지 않다. 우리은행을 제외한 주요 금융회사들은 모두 최대 30개월치 이상의 명예퇴직금을 제공했다. 하나은행과 SC은행은 급여의 최대 34개월치, 신한은행은 31개월치, KB국민은행은 30개월치, 비씨카드는 28개월치까지 지급했다. 금융권 부장급 월급이 800만~1,000만원 정도라면 명퇴금만으로 2억5,000만원에서 3억원 넘게 챙기는 셈이다. 자녀 학자금 지원도 눈에 띈다. SC은행과 KB국민은행은 대학생 자녀 2명까지 1인당 총 2,800만원의 학자금을 지원했다. 또 비씨카드는 대학생 자녀 2명까지 1인당 총 1,500만원의 학자금을 지원했고 신한금융투자는 명예퇴직 후 5년간 자녀 2명의 학자금을 지급한다.

다른 명목의 조건도 있다. SC은행은 명퇴금, 자녀 학자금과 별개로 창업지원금 400만원과 건강검진비 180만원을 줬다. KB국민은행도 월 100만원의 창업지원금을 퇴직 후 1년간 제공하기로 했고 여타 금융기관들도 정확한 액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위로금, 격려금, 전직지원 연수비 등의 명목으로 수백만원씩을 더 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명예퇴직의 명암=물론 명예퇴직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2010년 희망퇴직을 실시한 국민은행의 사례를 보면 직원들도 희망퇴직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당시 국민은행에서는 3,244명이 신청했다. 금융권 최대 규모였다. 기본급의 36개월치인 특별퇴직금에 학자금ㆍ창업지원금 등을 지급하니 직원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회사 입장에서는 경기둔화 이전에 조직의 군살을 빼서 좋고 직원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더 혜택을 준다고 할 때 나가는 게 좋겠다는 입장이 맞아떨어졌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도 "임원 등으로 승진할 생각이 없다면 좋은 조건일 때 다른 인생을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문제는 제2의 인생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점. 선택의 폭이 좁다. 전공을 살려 금융컨설팅 등을 할 수 있지만 이 역시 포화상태다. 그렇다고 경험 없는 자영업을 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수는 586만명(7월 말 기준)으로 지난해 1월 이후 58만명이나 증가했다. 특히 50대 자영업자 수는 168만4,000여명으로 지난해 전체 자영업자 수(559만여명)의 30.1%를 차지했다. 은퇴 이후 50대가 대부분 자영업으로 진출하지만 성공 가능성도 낮다. 자영업자의 1년 생존율이 70%, 3년 생존율이 35%에 불과한 것이 대표적이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좋은 조건의 명예퇴직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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