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8월24일] 헨리 카이저


헨리 카이저(Henry Kaiser). ‘조선왕’으로 불리는 기업인이다. 만톤짜리 수송선을 단 4일 만에 건조한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1882년 뉴욕의 독일계 빈농에서 태어난 그는 13세부터 잡화점 직원, 보따리 의류장사로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사진업으로 쏠쏠하게 돈을 벌던 그는 20세에 서부로 떠났다. 딸을 내주기 싫어 서부로 나가 사업가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라는 예비장인의 요구 때문이다. 건축자재물상에 취직해 회사를 키우고 결혼에도 성공한 그는 1914년 캐나다에서 건설업에 뛰어들어 공기단축을 무기로 승승장구했다. 부실시공이라는 의혹과 달리 최신 기술을 개발하고 신형 장비를 투입한 덕분이다. 대공황을 맞아 후버댐을 비롯한 대형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의 명성은 2차 대전에서 정점에 오른다. 수송선 건조사업을 맡아 척당 건조기간을 355일에서 한 달로 단축시켰기 때문이다. 비결은 과학적 경영관리 도입. 4일 15시간 만에 수송선을 만들어 ‘빨리빨리 헨리(Hurry up Henry)’라는 별명도 얻었다. 덕분에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1944년 부통령 후보 제의까지 받았다. 전후 자동차와 항공ㆍ시멘트ㆍ알루미늄은 물론 하와이 개발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전방위로 확대시켰으나 1967년 8월24일 85세로 생을 마쳤다. 후손들은 기타리스트 등으로 이름을 날렸어도 가업은 효과적으로 잇지 못했다. 미국판 한국식 재벌로 평가될 만큼 무차별적으로 펼친 사업을 후손들이 유지하지 못한 탓에 포천지로부터 ‘불운의 기업인’으로 선정된 그의 흔적은 카이저알루미늄 등 몇몇 기업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던 말년에 세운 미국 최대의 비영리 민간 건강재단인 ‘카이저 가족 재단’이 그나마 그의 이름을 빛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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