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1월3일] 리빙스턴과 스탠리


‘리빙스턴 박사님이시죠?’ 1871년 11월3일, 미국인 스탠리 기자(당시 30세)가 영국 선교사 리빙스턴(58세)을 찾아냈다. 한동안 초등학교 교과서에 탐험사의 명장면이자 인류애의 귀감으로 소개된 적도 있는 대목이다. 스탠리의 탐험 동기는 회사의 강권. 탐험가로 명성을 얻은 리빙스턴이 4차 아프리카 탐험을 떠난 뒤 3년간 소식이 없자 뉴욕 헤럴드지는 그를 내보냈다. 리빙스턴 기사가 흥미를 끌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탠리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수에즈운하 개통식(1869년 11월)을 취재한 뒤 발칸반도와 중동ㆍ인도 일대를 1년6개월간 돌아다녔다. 성화에 못 이겨 아프리카에 도착한 지 8개월 만에 운 좋게도 리빙스턴을 찾아냈다. 세계적인 특종기사를 안고 귀국한 스탠리는 전문탐험가로 변신했다. 리빙스턴이 평생을 바쳐 제작한 지도를 활용하면 돈방석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서 기자직을 버렸어도 탐험 비용 모금이 여의치 않았다. 1873년 공황 탓이다. 마침 지도의 진가를 알아챈 거액 투자자가 나타났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지원한 돈으로 1,500여명의 탐험단을 꾸린 스탠리는 탐험의 여정에서 비우호적인 원주민을 학살하고 추장 500여명을 회유해 ‘호의의 증표’ 500여장을 모았다. 증표는 레오폴드 2세의 영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돼 벨기에 면적의 80배인 콩고ㆍ르완다 일대가 식민지로 전락했다. 마침 공기타이어 발명으로 수요가 급증한 ‘검은 황금, 고무’를 캐내기 위해 국왕은 원주민 1,000만명을 학살하고 강제노동에 내몰았다. 악행의 상처는 여전하다. 쏟아지는 고무와 다이아몬드는 백인 차지일 뿐 원주민들은 기아와 식민지배자들이 획책한 종족분열책에 따른 내전에 시달린다. 어린 마음 속의 영웅이었던 스탠리에게 물어보고 싶다. ‘왜 그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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