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가면 볼쇼이극장, 영국에서는 로열오페라하우스를 가봐야 하는 것처럼 국가 정체성이 담긴 공연장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에는 '가부키'가 있고 중국에는 '경극'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창극으로 한국적 색채를 담은 공연을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가 국립극장이 서 있는 지점인 동시에 지향해야 할 방향입니다."
지난 18개월 동안 남산자락에 자리한 국립극장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1년에 한두 편의 신작에만 출연하던 예술단원들은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나오는 신작 연습으로 연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국립창극단ㆍ국립무용단 등 국립극장의 전속단체들이 선보인 작품들은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매진 사례를 낳기도 했다.
국립극장 60년사에 가장 거센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안호상(54ㆍ사진) 극장장을 지난 29일 오후 남산의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지난해 1월 안 극장장이 공모를 통해 취임하자 공연계에서는 "극장의 달인이 국립극장을 접수했다"며 비상한 관심을 쏟았었다
◇극장의 달인, 처음에는 문화에 문외한=중고등학교 때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던 안 극장장은 대학에 입학해서는 정치외교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동기나 선후배처럼 고시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외교학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는 안 극장장은 정작 졸업 시즌이 다가오자 자신의 진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다. "대학원을 갈까 고민도 했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닥쳤죠. 당시 인기가 높았던 대기업과 은행에 지원서를 내고 시험도 치러 합격을 하긴 했지만 정작 출근하려니 '꽉 막힌 거대 조직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선뜻 결심이 서지 않더군요."
그러던 차에 취업 게시판에 붙은 작은 공고문이 그의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행정요원을 모집한다'는 제목으로 예술의전당 건립 및 운영 기획을 맡을 직원을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예술의전당이라는 공식 명칭도 정해지지 않고 다만 국내 최초의 복합예술센터를 건립하게 되니 여기에서 일할 뜻있는 젊은이를 모집한다는 공고문이었어요. 아직 건물조차 들어서지 않았었지만 이런 일이라면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더군요. 남들이 해보지 않은 일을 내가 먼저 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결국 그는 1984년 예술의전당 공채 1기로 공연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예술의전당, 그 탄생과 성장을 함께하다=예술의전당은 1984년 건축가를 선정, 당초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1986년 완공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부지 매입과 우면산 터널 건설 등이 맞물리면서 1988년 1차로 음악당이 세워졌고 1993년 오페라하우스 완공까지 무려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안 극장장이 맡은 일은 예술의전당의 마스터플랜을 짜는 것이었다. "공연장은 건물만 짓는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건립 후 공연 상세한 공연 계획, 예컨대 오페라ㆍ오케스트라ㆍ발레 등 장르에 대한 선택의 문제와 상주단체를 둘지 혹은 외부단체 초청으로 프로그램을 짤 것인지에 따라 공간 계획 자체가 달라지거든요. 예컨대 상주단체를 둔다면 사무국과 연습실을 위한 공간을 따로 확보해야 하니까요. 아울러 연극이나 오케스트라, 발레 등 모든 장르별로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나 무대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각 공연장의 용도를 결정하고 인력 채용 규모를 산정하는 일들이 중요했습니다."
특히 공연장의 마스터플랜을 짜기 위해 공연계 인사들을 만나러 다닌 일은 지금도 그에게는 큰 자산이다. "건축가가 공간 기획을 하기 위해서는 운영 계획이 나와야 하는데 당시 건립추진위원회 사무국에서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연극계ㆍ무용계ㆍ음악계ㆍ미술계 등에 발로 뛰어다니면서 자문을 구했지요. 당시에는 예술의전당 건립을 위한 자문을 구하는 일이었지만 각 예술 분야의 내로라하는 분들을 직접 만나면서 저 나름대로의 네트워크를 넓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1993년 오페라하우스 완공과 함께 예술의전당은 현재의 골격을 갖췄다. 그리고 안 극장장은 오페라극장 공연담당차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공연기획에 직접 나서게 됐다. 그가 직접 기획에 나선 '말러교향곡시리즈'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조용필콘서트' '한일공동연극' 등은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그를 '극장의 달인' 반열에 올려 놓았다. "1990년만 해도 클래식이 대중화되지 않았던데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도 아니고 말러라고 하면 그게 누구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훨씬 많았어요. 하지만 우리에게 낯설다고 해서 터부시하는 풍토는 문제 있다고 생각해 말러교향곡시리즈를 밀어붙였지요. 그런데 대성공을 거두면서 국내에 말러를 소개하는 계기가 됐지요."
2002년 한일공동월드컵을 계기로 양국 간 문화 교류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기획한 한일공동제작연극은 '강 건너 저편에, 5월에(2002년)' '야끼니꾸 드래곤(2008년)' '아시아 온천(2013년)'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기획한 조용필 콘서트는 대중음악과 클래식의 접점을 모색하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적 정서 담은 컨템퍼러리를 생산하라=안 극장장이 예술의전당에서 일하면서 가장 목말라했던 부분이 프로그램 수혈이었다. 상주단체가 없었던 만큼 외부에서 프로그램을 공급 받아야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전속단체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국립극장 같은 제작극장을 엄마 같은 단체라고 본다면 예술의전당 같은 비제작극장은 아빠 같은 단체라고 비유할 수 있겠지요. 사실 해외에서 우리가 초청하는 공연단도 특정 극장에 소속된 단체입니다. 좋은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면서 여러 나라 극장으로부터 초청을 받는 것이지요. 정말 예술적으로 훌륭한 단체는 (일정이 너무 바빠서) 초청을 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국내에서는 전속단체를 갖고 있는 극장은 비경제적이며 관리하기 힘들어서 골치가 아픈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데 전속단체의 수준을 올려놓으면 여기저기서 초청하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문화적 경쟁력이지요. 예술의 본질은 공동 제작인데 왜 지금에 와서는 (전속단체를) 극장 발전의 암적인 존재로 오인하는지 답답할 때가 많았어요. 그러던 차에 국립극장장을 공모한다는 얘기를 듣고 지원서를 냈던 거지요."
지난해 1월 취임한 후 안 극장장은 국립국악관현악단ㆍ국립무용단ㆍ국립창극단 등 3개 전속단체에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컨템퍼러리(현대적 창작물)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아울러 책임운영기관으로서 성과를 내야 하는 경영목표의 기준과 수치를 수정하는 작업에 손을 댔다. 지난해 안전행정부와 합의를 거쳐 수정된 경영 목표는 ▲자체제작 공연비율은 2012년 71.1%에서 2016년 80% ▲자체 제작 공연 관람 인원은 16만9,137명에서 20만명 ▲자체제작 공연 수입 비율을 30%에서 35%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안 극장장은 "그동안 경영목표가 너무 높게 잡혀 있다 보니 대형 뮤지컬 대관 등에 의존하면서 변칙ㆍ편법 운영이 불가피했고 자체 제작 공연이 아닌데도 공동 주최라는 이름으로 분류했다"면서 "전속단체 예술단원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많이 제공하고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평가 받는 시스템으로 정착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국립극장의 위기에 대해 "컨템퍼러리를 해야 하는 극장인데도 불구하고 전통을 고수해야 하는 극장으로 착각하는 시각이 많다"고 진단한 안 극장장은 "한국 무용이나 국악, 창극을 통해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적 창조성이라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서양 예술이 봇물 터지듯 들어오면서 국립극장의 위상이 낮아진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시아적 색채, 특히 한국적 콘텐츠가 세계로부터 주목 받는 시대가 됐습니다. 경제적으로 아시아가 가장 성장이 빠르고 문화적으로도 아시아, 특히 한국이 주목 받고 있어요.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 국립극장이 제작극장으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은 한국적 예술 정신의 정수를 잘 담아낸 현대적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 단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He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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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공연 스케줄 미리 공개 시즌제 도입… 조기 매진 등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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