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중년 남성이어라'. 가족을 위해 일하는 기계로 살다가 50대 은퇴후 정체성과 인생 의미를 찾지 못하고 뒤안길로 스러져가는 남자들. 감성과 공감에 능한 여자들은 힘들때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도움을 청한다. 반면 남자들은 자신이 용도 폐기됐다고 판단하며 스스로에 갇혀 버린다. 한국 남자 노인의 자살률이 OECD 국가중 가장 높은 이유다.
지난해 한 월간지의 논픽션 공모 최우수상에는 '男, 혼자 죽는다'가 선정됐다. 무연고 사망자 83명을 추적한 대학생들은 유독 남성 비율이 높다는 점에 주목했고, 그 이유가 한국 남자들이 지고 있는 과도한 경제적, 사회적 부담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난 10여년 1,000여명의 남자 은퇴자를 면접한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신간 '남자가, 은퇴할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아템포)를 내놓은 한혜경(60·사진) 호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30~40대 한국 남자들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50대 은퇴자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의 30~40대는 정말로 자신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직장 은퇴 이후에도 살아온 날만큼을 더 살아야 하는 100세 시대. 그래서 선배 은퇴자의 심정과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는 것은 가장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은퇴했거나 곧 앞둔 베이비붐 세대를 보세요. '평생직장'에 전력투구하고 은퇴하니 경비나 택배 같은 단순노무직 밖에 할 일이 없어요. 그런데 그들이 30~40대를 더 걱정합니다. 자신들만큼 직장생활하며 10억원을 모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거죠. 지금 30~40대는 단지 '열심히'가 아닌, 취미 이상의 전문성을 갖춘 '좋아하는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 교수는 2001년과 2010년 정부 연구기관의 지원으로 1,000여명의 은퇴자를 조사하고, 특히 300여명은 심층면접을 실시했다. 그가 들은 생생한 '은퇴 순간의 진실'을 지금 30~40대, 훨씬 거친 은퇴를 맞을 이들에게 가감없이 전하고 싶었다. "지금의 30~40대 남성 중 절반은 평균수명이 100세 가까이 늘어나고, 현재 대학생들은 평생 5~6가지 직업을 갖게 될 겁니다. 최소 70세까지는 일해야할 '100세 시대'에는 여러 직업을 오가며 사는 걸 즐겨야해요. 더 긴 시간 일할 수 있도록. 정부가 '노후설계지원법' 같은 지원제도를 만든다지만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30~40대 남자가 지금 자신에게 더 투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면접자는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 '산업폐기물'이라고 자조했어요. 직장, 일에만 올인하다, 은퇴 후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거죠. 많은 독거노인, 노숙자들 중에는 한때 돈과 권력을 쥐었던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실패 후 가족들 볼 면목이 없어 집에도 못가는 거죠. 정체성의 '위기' 입니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너무 부족해요. 과거 여성학에서 독립적이고 자신을 소중히 해야 한다던 말들을 이젠 남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 같습니다."
여자의 경우 자살률은 25~35세 연령층에서 높아지고 이후 낮아지다 65세 이후 서서히 증가한다. 반면 남자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서서히 증가해 70세 이후엔 급격히 증가한다.
반드시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한 교수는 많은 은퇴자들이 '은퇴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깊은 틈)'를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50대에 은퇴해 국민연금을 받는 61세까지의 공백기간이다. 그래서 그는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은퇴 이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 2008년 일본 후생노동성은 '인생 85년 비전 간담회' 보고서를 통해 '40대의 장기휴가'를 제안합니다. 6개월~1년 정도의 장기휴가를 줘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 시간을 주는거죠. 물론 우리 정부도 '인생 다모작지원법' 같은 이름으로 정책적 지원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정년을 늦추거나 임금피크제를 확산시키는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남자만일까. 여전히 직장내 여성들이 평균급여나 고위임원 비중에서 불리한 위치라지만, 평균적으로 남자보다 더 수명이 더 긴 것은 상식이다.
"실제 만나보면 여자는 은퇴 후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습니다. 절대 일에 올인하지 않고, 배우는 것과 즐기는 것 역시 함께 가져가기 때문이죠. 또 중요한 것, 힘들 때 도와달라고 말합니다. 그걸 남자들이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여자를 이해하고 잘 지내기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늘 강조합니다."
사회복지학과 여성학을 모두 전공한 그는 오히려 요즘엔 남자들이 1970년대 억압된 여성성 수준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가부장제도와 자본주의가 뒤섞인 사회 풍토에서 남성들이 갖는 경제·사회적 부담이 그만큼 엄청나다는 것. 그나마 은퇴 전에는 가족들에게 조금 잘못해도 큰소리 쳤지만, 경제력이 없어지면 스스로 위축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한국 남자들은 서양처럼 은퇴 후 자기 인생 살겠다는 얘기도 못하죠. 이상하게 한국 남자들이 가족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을 갖고 있고, 너무 잘하려고 합니다. 지금 스칸디 대디(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북유럽 아빠) 붐을 보세요. 요즘 30~40대는 주중에 회사 일로 밤낮이 없고, 주말은 가족을 위해 캠핑이다 뭐다 해서 쉬지도 못합니다. 베이비붐 세대는 주말 골프를 쳐도 가족들에게 '업무의 연장'이었지만, 요즘 30~40대들은 눈치만 봅니다."
한 교수는 결국 '돈 버는 기계'도 남자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만이 스스로의 존재이유이자 보상가치라고 생각하는 세월이 은퇴 후 스스로를 후회로 몰아간다는 얘기다. 은퇴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투자했어야 한다는 점. 건강을 챙기고 악기나 여행 같은 취미를 갖는 등 여유가 없었다는 얘기다. 자식들 키우느라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것도 뼈아픈 후회다.
"제가 남자면 이런 현실을 어떻게 가만두냐고 말할 거에요. 일종의 문화적 압력이죠. 자신에게 투자하면서 아내와 가족에게 모든 걸 이해받으려 하지 마세요. 더구나 스스로 결정을 못내리고 흔들리는데 권하는 가족은 없습니다. 바른 결정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이해해줍니다. 남자들은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을까 겁내는데, '건강한 자기중심성'을 지키며 자기 길을 가야합니다."
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