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스포츠

[Culture & Life] 두산베어스 투수 유희관

느림의 미학으로 시즌 10승… 사회인야구라 놀려도 좋아요<br>최고130㎞대 느린 공 한계 느껴 타자별 강약점·변화구 대응 등 대학때는 일기 쓰며 달달 외워<br>프로 데뷔후 암흑기 길었지만 상무서 선발투수로 신세계 경험 이젠 에이스로 억대연봉 바라봐



뭐든지 빨라야 살아남는 세상, 무대가 프로야구 마운드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메이저리그에는 구속이 시속 150㎞는 기본이고 160㎞를 넘나드는 괴물도 드물지 않다. 국내 프로야구 역시 150㎞쯤은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이 같은 스피드의 정글에서 130㎞ 초ㆍ중반의 직구와 70㎞대의 '초저속' 변화구로 올 시즌 프로야구를 뒤흔든 '상식파괴형' 투수가 있다.

주인공은 두산 베어스의 왼손투수 유희관(27). 구단 사상 25년 만에 나온 정규시즌 '10승 왼손투수'로 팬들의 예쁨을 한 몸에 받더니 생애 처음으로 나간 포스트시즌에서는 플레이오프 최우수선수(MVP)에 오르며 '전국구'로 발돋움했다. 포스트시즌 5경기 등판에 평균자책점은 1.53(29⅓이닝 5자책점). 한국시리즈 전까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성적만 놓고 보면 7⅓이닝 1실점, 7이닝 무실점, 7이닝 1실점으로 평균자책점(0.84)이 1점도 안 된다. 비록 두산이 한국시리즈 우승 문턱에서 돌아서기는 했지만 '느림의 미학'을 전파한 유희관은 시즌 뒤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2013시즌 한국프로야구가 새로 발견한 '보물' 유희관을 지난 6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넷에 '유희관'을 치면 사회인야구 수준의 스피드라는 '악플'도 많이 달린다"며 "공은 느려도 경기 운영이나 위기관리능력에선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악플도 환영한다"고 말했다.

강속구 대신 야구일기

지금까지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은 몇㎞냐고 유희관에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138. 138㎞면 다른 일부 선수들에게는 변화구 구속이다.

'내 공이 느리구나'라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서울 장충고 시절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땐 외야수였고 고등학교 때 투수하면서부터 그런 얘길 많이 들었어요. 경기 운영은 괜찮은데 공이 느려서 한계가 있다는 말…. 스트레스였죠." 전국대학야구선수권 MVP에다 야구월드컵 대표로 뽑힐 정도로 꽤 잘나가던 대학교 때도 늘 구속이 약점으로 지적됐다. 어릴 적 우상이 불같은 강속구로 유명했던 LG 이상훈이었으니 스트레스는 더 심했을 것 같다.

유희관은 2009년 전체 지명순위 42순위로 겨우 두산에 입단했지만 사실 구속에 발목이 잡혀 프로에도 못 올 뻔했다. 두산 관계자는 "신인 드래프트 때 유희관은 계획에 없던 선수였다. 하지만 제구력이 좋다는 평가가 있었고 특히 중앙대 출신이라 일단 뽑았다"며 "이 정도로 해주리라고는 당시엔 생각도 못했다"고 귀띔했다.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중앙대 이사장을 맡고 있어선지 두산에는 중앙대 출신 선수에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있다. 두산그룹이 중앙대를 인수한 시점은 2008년. 유희관의 졸업과 딱 맞아떨어진 '신의 한 수'였다.

그동안 유희관이 구속을 늘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체 힘을 키우려고 100m 달리기도 많이 뛰고 남들보다 웨이트트레이닝도 오래했죠. 멀리던지기도 많이 하고…. 그래도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유희관만의 '야구일기'. 그는 대학 시절 경기를 할 때마다 일일이 적었다. 특정 타자의 강ㆍ약점, 변화구를 이렇게 던지고 저렇게도 던져보니 어떻게 다르더라 하는 것, 타자와의 타이밍 싸움을 어떻게 가져가니 통하더라 하는 것 등을 빠짐없이 적어놓고 달달 외웠다. 지금의 유희관이 공 스피드는 느리지만 타자와의 수싸움에 강한 투수로 인정받는 것도 그때의 부단한 공부 덕분이다. 유희관은 당시를 돌아보며 "남들과는 다른 걸 더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고 말했다.

땜질 선발에서 왼손 에이스로

어렵게 프로에 왔지만 '암흑기'가 길었다. 데뷔 첫해인 2009시즌 성적은 16경기에서 13⅓이닝 등판에 6자책점(평균자책점 4.05). 2010시즌은 고작 5경기 등판(3⅓이닝 4자책점ㆍ평균자책점 10.80)에 그쳤다. 프로의 세계는 주전경쟁부터가 고난이었고 등판 기회가 불규칙하다 보니 뭔가 보여줄 여유도 없었다. 1군보다 2군이 더 익숙한 생활. 유희관은 프로 1ㆍ2년 차 때를 돌아보며 "나 자신한테 지고 들어갔던 것 같다"고 진단했다. "대학 때와는 경기시간도 다르고 관중은 많은데다 곳곳에 방송 카메라들도 보이고…. 떨고 주눅들어서 제 공을 던지지 못했나 봐요."

유희관은 "군대가 터닝포인트였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2011년과 지난해 상무에서 야구를 했다. 상무는 2군리그 소속이라 프로구단 2군들과 경기를 한다. "박치왕 상무 감독님이 저한테 선발투수를 맡기셨어요. 전역하던 해에 2군리그에서 12승에 평균자책점 2.40을 찍었죠.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2위를 했어요." 프로 입단 후 중간계투로만 나가던 유희관에게 선발투수는 '신세계'였다. 어깨보다 '머리'로 공을 던지는 유희관에게는 긴 이닝을 끌고 가며 스스로 경기를 풀어가는 선발이 더 재미있었다.

전역한 뒤 올 시즌 다시 돌아온 두산. 군에서 신세계를 경험하고 온 유희관에게 데뷔 후 첫 1군 선발 기회가 주어졌다. 무대는 5월4일 LG와의 라이벌전이었다. 유희관은 "첫 선발등판인데도 1ㆍ2년 차 때처럼 떨리지가 않았다"고 했다. 결과는 5⅔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투수.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의 부상공백을 메우러 '땜질'로 들어간 경기에서 일을 낸 것이다. 유희관은 "그 뒤에 다시 중간계투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엔 게릿 올슨이 아파서 빠졌다. 그때부터 쭉 선발로 뛰게 됐다"며 웃었다. 외국인선수 2명의 잇따른 부상이 유희관에게 행운을 가져다준 셈이다. 하지만 부상자가 생겼을 때 감독이 1순위로 불러 올릴 만큼 유희관의 준비가 철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연봉 2,600만원의 신화


외아들인 유희관은 초등학교 5학년 말에야 야구부에 들어갔다. 옆 학교 야구부원들이 나눠준 모집전단을 보고 며칠을 울고 떼써 부모님을 항복시켰다. 옆 학교(방배초)로 전학을 가면서까지 야구에 몸을 던졌다. 그렇게 야구만 보고 달려왔지만 프로 첫해 계약금은 4,000만원, 연봉은 프로 최저인 2,000만원이었다. 억대 계약금이 보통이지만 직구 최고구속이 130㎞대인 유희관에게는 먼 나라 얘기였다. 2010년과 올해 연봉도 각각 2,500만원과 2,600만원이다.

관련기사



아직 차도 없고 면허도 없어 홈경기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올겨울은 누구보다 따뜻하게 보낼 것 같다. 올 시즌 10승7패1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53을 찍고 '가을야구 에이스'로 활약한 이상 기록적인 연봉 인상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억대 연봉 진입도 조심스럽게 예상되는 가운데 유희관은 "오르긴 오를 텐데 많이 받으면 좋지 않겠나. 알아서 잘 주실 거라 생각한다"며 수줍게 웃었다.

최고의 한 해를 보냈으니 당장 내년 시즌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유희관은 "타자들이 올해 내 공을 눈에 익힌 이상 공도 느리기 때문에 내년엔 박살 날 거라는 관측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 있다고 한다. 그는 "올해 선발 한 축을 맡은 투수로서 책임감도 있으니 그만큼 스프링캠프 때 올해보다 더 노력할 것"이라며 "올 시즌엔 왼손타자한테 안타를 더 많이 맞았는데 문제점을 연구하고 더 많이 분석할 것이다. 왼손타자한테 안 던지던 공을 내년엔 던지겠다"고 '깜짝' 선언했다. 그 공이 뭔지는 비밀에 부쳤다. "돌아보면 올해 선발로 던질 거라 생각도 못했고 10승은 상상도 안 했어요. 그러니 내년에 몇 승을 하겠다는 포부는 저한텐 과분합니다. 그래도 목표는 하나 있어요. 공은 느리지만 마운드에 서면 누구와 상대하든 자신 있고 당당한 투수였다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거요."

He is…



▲ 1986년 6월1일 서울

▲ 키 180㎝ 몸무게 88㎏

▲ 방배초-이수중-장충고-중앙대

▲ 2009년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 42순위 지명

▲ 2009년 0승0패 평균자책점 4.05

▲ 2010년 0승0패 평균자책점 10.80

▲ 2011~2012년 상무 복무

▲ 2013년 10승7패1세이브 평균자책점 3.53

▲ 2013년 플레이오프 MVP



연관 검색어로 본 유희관



74㎞커브 동영상 '느려도 너무 느린 공' 타자 지켜보기만
바나나우유 엉덩이 커 바나나우유통에 몸매 비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유희관(27ㆍ두산)을 치면 가장 먼저 뜨는 연관검색어는 '74㎞ 커브 동영상'이다. 두산과 넥센의 올 정규시즌 경기에서 유희관이 커브를 던지는 영상으로 당황하는 타자의 모습이 그대로 찍혀 있다. 넥센 타자 유한준은 빠른 공을 예상했다가 느려도 너무 느린 공이 '쓰윽' 하고 들어오자 스트라이크로 꽂히는 공을 지켜보기만 한다. 유희관은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을 거의 날마다 쳐보기 때문에 연관검색어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70㎞대의 '아리랑볼'은 한 경기에 한두 개만 던질 뿐 커브의 평균구속은 109~110㎞ 정도 나온다고 한다. 연관검색어 중에는 '진갑용'도 있다. 지난 7월 잠실구장에서 열린 삼성전에서 삼성 베테랑 포수 진갑용이 유희관의 79㎞ 커브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영상이다. 일부러 힘을 빼고 던져 대선배를 농락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였다. 유희관은 "절대 그런 뜻은 아니었다. 타자를 상대하는 나름의 방법 중 하나였을 뿐"이라며 "이후 따로 기분 나쁜 감정을 표현하시거나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바나나우유'라는 연관검색어도 있다. 바나나우유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엉덩이가 커 몸매가 바나나우유 통을 닮았다는 의견이 팬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의외의 인맥도 있다. 유희관은 여자 프로골퍼 장하나(21ㆍKT)와 친하다. 장하나는 올 시즌 국내 여자프로골프에서 상금퀸을 다투는 강자. 유희관은 "(장)하나가 잠실구장에 시구를 하러 왔을 때 시구 지도를 하면서 친해졌다. 하나가 골프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케이크를 선물한 적이 있고 전화와 문자로 서로를 응원하는 오빠동생 사이"라고 설명했다.


양준호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