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온기 사라진 금융가… 희망 아닌 '희망퇴직'

불황 탓에… 짙어지는 구조조정의 그늘

"지금 안나가면 굴욕 당할것" 곳곳서 사실상 퇴출압박 커져

면담 강요에 임신부 실신까지

환란때처럼 불가피한 선택 아닌 열등 직원 가려내기 활용 '씁쓸'

출근길에 핸드폰을 열었더니 불통이다. 불길한 마음으로 회사에 도착했다. 책상 위에 해고통지서가 놓여 있다. 인사담당 임원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따졌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곧 빈 박스에 자기 물건을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수십 년간 복무한 회사와의 마지막 날이었다.

J C 챈더가 연출하고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한 '마진콜'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전 24시간을 다뤘다. '조작된 진실'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금융기관의 탐욕이 세계경제를 어떻게 황폐화시킬 수 있는지를 날것 그대로 담았다.


국내 금융인들에게 그보다 놀랍게 다가온 것은 미국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관행이었다. 직원을 해고하기까지 딱 하루가 걸렸다. 실직이라는 날벼락을 맞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회사가 지급한 핸드폰을 부숴버리는 일과 회사의 기밀정보가 담긴 USB를 남은 직원에게 전달하는 일뿐이었다.

경기불황과 저금리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국내 금융회사들이 잇따라 인력감축을 진행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와 2008년 글로벌 위기 당시에는 국가의 상당 기업이 인적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도리어 금융회사의 명퇴가 규모 면에서 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회 전체의 모습보다 금융가의 구조조정 모습이 훨씬 살벌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인적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금융가의 온도는 과거보다 훨씬 차갑다.

금융회사들은 이번에도 '희망퇴직'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의 제도를 들고나왔다. 이름만 놓고 보면 사실 '희망'이라는 단어에는 종업원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과연 그럴까.

올 들어 25일까지 진행된 국내 금융회사들의 구조조정 과정을 들여다보면 '희망'이라는 이름과는 정반대의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최근 희망퇴직을 진행하던 중소형 증권사에서는 사실상 퇴직을 강압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녹취록 안에는 형식만 희망퇴직일 뿐 강압과 굴욕, 협박이 주종인 사측의 압박작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인사담당 임원은 "나가랄 때 안 나가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책상과 의자만 주고 하루종일 가만히 앉아 있게 한다. 왕따시켜 버리면 한 달을 못 버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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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직으로의 인사발령을 예고하며 퇴직을 종용하는 경우는 그나마 점잖은 축에 속한다.

최근 희망퇴직을 진행한 외국계 A은행은 희망퇴직 대상자들에게 회사를 관두지 않으면 대출모집인이나 카드모집인처럼 영업하는 특수영업부로 보낼 것이라 강압했다. 이 은행 노조의 한 관계자는 "말이 특수영업부지 사실상 잉여인력으로 분류해 수치심을 느끼게 하겠다는 것"이라며 "부양가족을 이유로 퇴직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남으면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퇴직을 종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전했다.

최근 구조조정이 절정에 이르고 있는 보험업계에서는 차마 있어서는 안 되는 일까지 발행했다. 한 외국계 보험사의 임신 6주차 여직원이 사측으로부터 희망퇴직을 종용 받다 실신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회사 노조 관계자는 "피해 여직원은 퇴직 의사가 없음을 지속적으로 밝혔는데도 사측이 계속해서 면담을 진행해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며 "피해 당사자는 임신 6주차 산모로 사측에 임신 사실을 알렸지만 이날까지 3차례에 걸쳐 면담이 강요됐다"고 말했다.

희망퇴직은 늘 있던 일이다. 그러나 과거 희망퇴직이 외환위기와 같은 거스를 수 없는 조류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것이라면 2010년대 들어서는 열등직원 가려내기 식으로 퇴직제도가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전자에는 헤어지는 동료를 향한 온기가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직원의 방패막이 돼야 하는 노조가 사측의 희망퇴직을 거드는 일도 일어난다. 또 다른 외국계 B은행의 한 직원은 "노조가 사측과 머리를 맞대고 퇴직 프로그램을 만들어 당초 예상보다 퇴직인원을 늘렸다는 말이 돌았다"며 "노조는 퇴직조건을 좋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라고는 하지만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봄, 제일은행 직원 4,000여명이 감원당하면서 '눈물의 비디오'라는 영상이 화제가 됐다. 폐쇄 직전 서울 강남 테헤란로지점 직원들의 하루를 담았는데 퇴직당하는 직원들이 등장해 "남은 사람들이 잘해달라"며 울고 지켜보는 사람도 함께 울었다. 이런 풍경을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김기준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은 "요즘 같은 때 스스로 퇴직을 희망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을 것"이라며 "자본은 마치 노동자 본인이 원해서 퇴직을 하는 것처럼 희망퇴직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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