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안단테 안단테

김희중 <논설위원>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가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 서울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 교보생명빌딩에 걸린 시구다. 교보생명은 철이 바뀔 때마다 벽면에 수채화 같은 글귀를 바꿔 달아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글귀는 보통 시에서 따오는 게 많은데 읽는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어 재미있다. 이전의 것을 보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도 있었고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이라는 것도 있었다. 사랑에 빠진 젊은이라면 사랑싸움을 떠올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부모라면 속썩이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우리도 그랬었지 뭐”하며 빙그레 웃음을 짓기도 했을 것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눈깜짝할 새에 지나가버렸던 청춘을 회상하며 앞으로 더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하기도 했을 것이다. ‘가는 데까지…’는 올해 팔순을 맞는 김규동 시인의 ‘해는 기울고-당부’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지극한 도(道)는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막히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는 천지만물의 원리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이런 뜻이겠거니 하고 나름대로 풀어본다. 험난한 인생 너무 핏대올리며 살 게 무에 있나, 힘들고 지치면 한 템포 늦춰 주변도 휘휘 둘러보고 그렇게 쉬다 보면 가빴던 숨결도 조금은 차분해지고 쫓기다시피 달리며 사는 삶도 약간은 여유가 생길 것이고 그러다 보면 예전에 미처 몰랐던 길도 보이지 않겠느냐고. 경제·교육·정치 모두 꽉 막혀 각박하고 답답한 요즘에 가슴에 새겨둘 만한 시다. 사실 지금 우리 사회 어느 곳 하나 신명나게 돌아가는 데가 없다. 갈등과 분열, 대립과 증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경제는 물에 젖은 솜뭉치마냥 가라앉고 있다. 사회적 갈등은 증폭되면서 가진 자도, 없는 자도 모두 불평불만이다. 교육은 온 나라가 벌집 쑤셔놓은 듯 어수선하다. 정부도, 대학도 이렇다 할 해법도 제시하지 못한 채 대립각만 세우고 있다. 힘든 것은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이다. 꿈과 희망을 키워야 할 아이들이 내신과 논술에 치여 충혈된 눈으로 세상을 원망하며 청춘을 보낸다. 동급생들은 모두 경쟁자이고 적이다. 만인과의 투쟁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게 오늘날 교육의 현실이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청소년이 학창시절에 협동심을 기르기보다는 적개적인 경쟁심만 키운 아이들이 자라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지 걱정이다. 교육이 이래서는 안된다. 교육부와 대학이 다툴 일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과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며 머리를 맞대면 답이 나올 것이다. 한심스런 정치는 좀더 긴 호흡이 필요하다. 자기주장만 외치고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하는 지금과 같은 식이라면 아예 휴업하는 게 낫다. 좀 쉬어라. 상대방을 헐뜯고 벽을 더욱 높이 쌓는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도 않는다. 피곤하고 짜증만 쌓일 뿐이다. 갈등접고 한 템포 쉬어 갔으면 ‘가는 데까지 가거라’는 시인의 가르침은 최선을 다하되, 그래도 답이 보이지 않으면 한 템포 늦춰가라는 뜻일 게다. 우리는 너무 조급하다. 무엇에 쫓기다시피 살고 있다. 지금 당장 이루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처럼 애면글면한다. 사람이 실수를 하는 것은 성급하기 때문이다. 성급함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방법이나 순서는 걷어차버리고 실속 없는 것을 가지고 다투게 한다. 이제는 좀 천천히 가보자. 앞이 막혔다고 짜증내고 억지로 뚫으려 하기보다는 좀 느긋하게 기다려보자. 막혔으면 쉬었다 가고 그래도 길이 안보이면 돌아가면 좀 어떤가. 되돌아보면 돌아가는 게 빠른 경우도 많았지 않았던가. 이 팍팍하고 답답하고 막막한 세상, 오늘 하루만이라도 삶의 템포를 안단테로 늦춰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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