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우리나라가 관치금융에 살아온 세월이다. 1961년 5ㆍ16쿠데타를 성공한 군사정권이 그 해 10월25일 부정축재환수절차법으로 4개 시중은행을 국유화해 만들어낸 정부의 금융무기. 경제개발 시대에는 막대한 자금으로 기업의 든든한 지원군이 됐지만 항상 규제라는 쌍생아도 만들어냈다. 국제그룹 해체와 부실기업 정리, 외환위기 때 본격화된 기업 구조조정 등이 그 산물이다. 눈부신 성장의 대가로 차입 경영의 늪에 빠진 기업은 은행과 정부 앞에서 철저히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5공화국 시절 은행 민영화 이후에도 이렇게 금융은 기업의 위에 섰고 정부는 은행 위에 군림해 기업을 요리했다.
반세기간 이어진 규제의 달콤함에 취했나. 아직도 기업의 구조조정은 언제나 대출 규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2011년 금융투자시장을 뒤흔들었던 LIG건설의 기업어음(CP) 사기 발행사건이 났을 때 권혁세 당시 금융감독원장은 "그룹 계열사를 우대하는 은행권의 여신관행 개선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은행 대출을 통해 대기업을 규제하겠다는 뜻이다. 직접적 원인이 됐던 CP라는 자금조달 수단에 대해서는 "대주주의 도덕적 해이가 문제"라는 진단이 전부였다. 그 사이 CP는 다시 독버섯처럼 퍼져갔다.
기어코 또 사달이 났다. 동양사태다. 금융당국은 이번에도 똑같은 처방전을 내밀었다. 주채무계열의 범위를 넓히고 재무구조개선약정 대상이 아닌 기업이라도 부실 가능성이 있다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관리채무계열이라는 것도 추가했다. 기업 감시병으로 은행의 역할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최근 1년2개월 사이에 줄줄이 무너진 문제아들로 시장은 온통 죽겠다고 난리다. 정치권도대책을 내놓으라 성화니 이해도 된다.
그러나 아쉽다. 금융당국은 기업에 대한 감시를 은행을 통해 강화하겠다고 했지만 자금을 조달하는 시장은 어떻게 할지 얘기가 없다. 겨우 투자자 보호 차원에서 전체 차입과 시장을 통한 차입 규모를 공시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게 전부다. 이것으로 시장의 불안이 사라질지 의문이다.
기업의 자금조달 루트는 최근 빠른 속도로 은행에서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업이 은행 대출을 비롯한 간접금융 분야에서 조달한 자금은 2008년 115조원에서, 지난해 17조3,000억원으로 뚝 떨어졌다. 반면 주식과 회사채와 같이 자본시장에서 직접 조달한 자금은 같은 기간 66조9,000억원에서 72조원으로 늘었다. 올해 상반기에도 직접금융 조달액이 30조4,000억원에 달해 간접금융을 넘었다. 지금 기업에는 시장이 은행보다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금리 시대에 접어들면서 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처럼 담보를 잡히거나 굽실거리지 않아도 더 싼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저금리 시대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건 정부와 시장의 공통된 시각이다. 대출보다는 회사채, CP 발행이나 주식과 같은 시장성 채무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은행의 부실이 시장 또는 투자자의 부실로 넘어갈 수 있는 환경이라는 뜻도 된다. 반면 은행 대출이 감소하면서 주채무계열 대상기업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금의 은행을 통한 관리가 어려워지고 동양과 같은 기업이 더 나올 개연성이 커졌다.
시장의 우려는 여기에 있다. 기업은 점점 더 많은 회사채와 주식ㆍCP를 들고 시장을 찾아오는데 이를 감시하고 감독할 수단은 보이지 않는다는 두려움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금융당국도 시장 변화에 눈을 돌리고 이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 시장 팽창에 대응할 위기경보시스템의 정상화는 이를 위한 선결 조건이다. 어떤 기업이 우량하고 부실한지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거름장치인 신용등급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증권사 등 금융상품 판매자들의 책임을 좀 더 무겁게 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은행에서 넘어온 부실을 시장이 떠안는 불상사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지 않겠나.